묵상자료 2204호 (2007. 5. 30. 수요일).
시편 시 92:9-12.
찬송 41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책에는, 카우누스 이유리우스 라는 사람의 얘기가 나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조금 언급된 무명의 철학자이지만, 세네카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유리우스를 “시공을 초월한 창연히 빛나는 큰 별”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이유리우스와 가이우스 황제가 열띤 논쟁을 하고 있었대요. 조금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철학자에게 화가 난 폭군 가이우스 황제가, 그가 집으로 돌아가자 그를 처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유리우스를 처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유리우스, 저 같으면 살려고 노력할 것 같은데요. 궁전을 향해서 머리를 숙이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이 불길한 소식을 듣고 친구들을 슬퍼하지요. 그 때 이유리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째서 너희들은 슬퍼하는 거냐? 너희들은 영혼이 불멸이라는 것을 의심 하는구나. 나는 이제 곧 진리를 보게 될 것이다.” 라고요. 삶의 어떤 순간에도 그는 영혼은 불멸한다는 신념을 진리를 확인하려 했는데요.
그는 처형 당일에도, 감옥 안에서 체스를 두고 있었대요. 집행인이 다가와서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체스를 두고 있던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지상을 떠난 후에 자네가 이겼다고 거짓말하면 안 되네.” 라고요. 그리고 간수에게 증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마치 산책을 나가는 사람처럼 감옥 문을 나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그의 철학 교사가 함께 동행했고, 생애 마지막 순간에 철학교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유리우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의 영혼이 눈 깜빡할 사이에 육체를 떠나는 것인지? 영혼이 떠나는 것을 볼 수 있는지? 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만약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본다면, 내 친구들을 찾아다니면서 영혼의 참다운 모습을 알려주겠습니다.” 라고요. 그러고 보면 진리를 찾고자 하는 철학자에게는, 폭군의 부당한 명령이 체스 한판만도 못한 것 같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년 5월 23일 방송>
2. 빌립보에 보낸 바울의 편지는 기뻐하라는 주제가 우뚝 서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보아도 기뻐할만한 충분한 이유를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70인의 제자들이 전도를 하고 돌아와서 보고회를 가진 듯 합니다. 예수님은 시작도 그랬지만, 끝 마무리도 언제나 분명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했는지, 그 결과는 어땠는지, 스스로 정리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유익한 일일 것입니다. 제자들의 전도 보고가운데,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몰아낸 것이 가장 화제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들뜬 기분이 되었고, 신바람이 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기뻐하시면서 한 마디 거드셨습니다.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18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제자들의 활동을 이미 알고 있었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져야 할 참 기쁨이 무엇인가에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귀신을 몰아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찾아야 할 기쁨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것은 천국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20절)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취감이라는 기쁨을 한껏 추켜세우곤 합니다.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자격증의 따내고, 시인이나 화가로 등단하고, 안수를 받고, 그리고 어떤 그룹의 회원이 되고 하는 등을 성취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란할 정도로 많은 직함을 적어둔 명함을 들고 다닙니다. 아무개 교회 담임목사로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복잡한 명함을 들고 다닙니다. 그것을 일종의 인생 성취의 증거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설명없이 상대에게 자신을 잘 소개한다는 선의(善意)에서 출발했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쓸데없는 짓을 하고 만 셈이 된 것입니다. 중국에 있는 저의 제자들에게 나눠줄 생각에서 만든 저의 명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못난이 노릇은 다 하고 다니는 자아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인생 성취는 자랑할만한 것도, 기뻐할 일도 아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눈을 돌리게 하십니다. “그대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기뻐하라”고 말입니다. 갑자기 생명책에 내 이름이 적혀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있다, 없다 라고 쉽게 말할 것이 아닙니다. 그 책에 이름을 적는 일은 우리 자신들이 아닌 때문입니다. 내 이름을 기억하실 주님이 하실 일입니다. 주님이 나를 기억하실까?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그런 겸손한 마음이 잔잔히 솟아 오르고 계십니까? 그러시기를 바랍니다.
3. 오늘 신약을 마치면, 내일부터는 <행복한 결혼 생활>과 <지혜 문서>를 강의하게 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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