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962(2012. 3. 22. 목요일).

시편 136:5-8.

찬송 7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 <>에 꽃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꽃은 도대체 무슨 꽃이었을까요? 시를 읽어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세상에는 수많은 꽃들이 있는데, 아무리 읽어봐도 무슨 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름을 불러주었다고 하는데, 그냥 꽃아! 라고만 불렀을까요? 뭐라고 불렀는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이 유명한 시는 1958년에 발간한 시집 [꽃의 소묘]에 수록되었는데요. 이즈음에 시인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에 붙은 이름들이 제대로 붙여진 것인지, 그러니까 언어가 존재의 본질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 대해 끈질기게 탐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말하는 꽃은, 사물의 존재에 맞게 부여되는 언어, 즉 시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요. 도대체 어떤 종류의 꽃이었을까 하고 궁금합니다. 황동규 시인이 그 실마리를 던져 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추측했습니다. “그 크기나 지속성을 생각할 때, 적어도 그 꽃이 벚꽃이나 진달래를 상대로 한 것 같지는 아닌 것 같고, 맥이 닿을만한 꽃을 찾는다면,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산다화라는 생각이 든다.” 산다화 바로 동백꽃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고향은 저 남쪽 끝에 있는 통영이었고요, 이곳은 동백으로 유명하지요. 실제로 시인은 산다화라는 이름으로 많은 시를 썼습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의 털옷 속에/ 일찍 눈을 뜨는 남쪽 바다/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산다화가 등장하는 시인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 하나 <처용 단장> 중에서 읽어 드렸는데요. 그런데 누구나 다 아는 동백이라는 이름 대신, 굳이 왜 산다화라고 했을까요? 문학 평론가 류종호 선생이 쓴 <시인의 꽃>에 이런 대목이 등장합니다. “산다화가 어떤 꽃이냐 여쭈었더니, 사실은 나도 잘 모른다. 소리랑 글자가 좋아서 썼을 뿐. 산다화를 거푸 노래한 시인 김춘수선생은 말하였다.” 시인의 마음에는 그저 동백이라는 소리와 글자보다는, 산다화라는 소리와 글자가 더 좋았던 모양입니다. 하기는 이름을 부를 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동백아 보다는, 산다화야 하는 것이 더 나지막하고 애틋하고 부드럽기는 해요. 이제 곧 동백의 계절입니다.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빨갛게 멍이든 그 꽃봉오리를 보게 되면, 이렇게 읊어도 좋을 것 같아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예쁜 산다화야”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213일 방송>

 

2. 오늘부터 마가복음을 읽게 되었습니다. 흔히 마가복음의 특징 중의 하나로 메시야 비밀 사상을 꼽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처럼 예수님을 메시아(혹은 그리스도)로 알아차린 사람들에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함구령(緘口令)을 내린 것을 두고 하는 신학 용어입니다. 훗날 메시야 비밀 사상이, 역사적 예수님을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로 지상 낙원을 건설할 분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잠정적 대안으로써 사용하게 됐다는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지상 낙원을 건설할 영웅으로써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다음에 참된 메시야를 알게 될 때까지는, 비밀에 붙여야 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소경 코끼리 다리 만지기>라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느 한 쪽만 보고서 그게 전부인양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경계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진리에 이르기까지는, 혹은 보다 균형 잡힌 신앙에 이르기까지는 참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의 신앙의 시계(視界)를 더욱 더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남들이 하는 말이나, 다른 이들의 주장에 너무 빠져들지 말고, 자신의 생각 혹은 자신의 시각을 가져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오늘 우리들에게 교훈하는 것 같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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