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154호.
시편 37:1-4.
찬송 41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루의 시작이란, 오늘 하루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행복의 기회가 무궁무진하게 펼쳐졌다는 뜻입니다. 장 자크 루소가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해가 뜰 때 일어났다. 행복했다. 나는 산책했다. 행복했다. 나는 부인을 만났다. 행복했다. 나는 부인 곁을 떠났다. 행복했다. 나는 숲을 걸어 다녔다. 행복했다. 나는 책을 읽었다. 행복했다. 나는 정원에서 일했다. 행복했다. 나는 집안일을 했다. 행복했다. 가는 곳마다 행복이 나를 따라다닌다. 그러나 행복은 그런 일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 안에 머물고 있었다.” 우리 안에는 행복이라는 우물이 들어 있고요. 신기하게도 이 우물은 퍼낼수록 점점 더 풍성해 집니다. 만약에 내 안의 행복이 말라버린 것 같다면요, 그건 자주 길어 올리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행복이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고요, 많이 끌어다 쓸수록 더 많이 샘솟는 우물 같다는 사실, 꼭 믿어보시기 바랍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7월 9일 방송>
2. 개인이건 민족이건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란 다름 아닌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모든 문제의 근원인 죄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공하고 출세하면 좋은 인간 좋은 민족이 되는 줄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죄를 아는 데서 희망이 생깁니다(4:22).
보통 사람들은 인간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성적인 가운데 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선한 사람도 될 수 있고 악한 사람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너무나도 소박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갓 태어난 아이까지도 제 뜻대로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울고 보채고 물고 뜯습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 인격을 수련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조금만 방심하면 죄 가운데서 헤맬 수밖에 없다는 말은, 죄의 뿌리가 너무도 일찍부터 깊이 뻗어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단순한 잘못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빗나간 생각과 행동”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죄의 방향성은 하나님을 떠나간 데서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일, 그것은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일이며, 자신의 뿌리를 내팽개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떠날 때, 누구나 죄 가운데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는 길을 예언하였습니다(3:14).
예레미야는 유다의 요시야로부터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왕이 재위하던 시절에 선지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요시야를 제외한 네 왕들은 우상숭배를 하고 도덕적인 타락과 영적인 부패의 길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만이 사는 길이라고 외쳤지만, 거짓 선지자들의 장막에 가려서 듣기는커녕 오히려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문제를 푸는 방식은 언제나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인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맡기는 방법입니다. 전자는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후자는 왠지 무책임한 태도처럼 생각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항상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을 사는 길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 둘 사이에는 항상 충돌이 있었고, 인본주의자들이 승리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18-20절).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잠깐이지만 절망적인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앞이 캄캄할 때, 그 때 우리 스스로를 진지하게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무력함을 확인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런 때 우리의 존재와 그 근원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며, 또한 성경 말씀에 눈을 돌리는 기회가 됩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경험을 가졌습니다. 그는 역사 시련기에 배후에 서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 우리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똑똑히 바라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고, 전적으로 복종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를 비웃고 박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3. 즐거운 한가위가 되시기 바랍니다.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2. 10. 14. 성령강림절후 스무째주일/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 / 히 2:9-18. (0) | 2019.05.13 |
---|---|
[2012. 10. 7. 성령강림절 후 열 아홉째주일] 천국과 지옥. / 막 9:38-50. (0) | 2019.05.12 |
[2012. 9. 23. 성령강림절후 열 일곱째주일] 외모에서 중심으로. / 약 2:1-5, 8-10. (0) | 2019.05.12 |
[2012. 9. 16. 성령강림절후 열여섯째주일] 침묵 명령의 의미. / 막 7:31-37. (0) | 2019.05.12 |
[2019. 5. 12. 부활절 넷째주일] 소통과 불통의 차이. / 요 10:22-30. (0) | 2019.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