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846(2020. 2. 13. 목요일).

시편 68:17-18.

찬송 9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질투란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고,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미움이다.” <나쇼몽/羅生門>을 쓴 일본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중에 <가파>라는 작품이 있는데요. 가파는 우리나라 도깨비와 같은 일본의 요괴입니다. 류노스케는 가파들의 세계를 빌어 인간세상을 비판하는데요. 가파가 이렇게 통렬하게 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가! 이 악당놈, 네 놈도 멍청하고 질투심 많고 추잡하고 뻔뻔스럽고, 저만 잘난 줄 알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동물이지. 나가! 악당 놈.” 처음에는 시원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찔립니다. 누군들 그 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가끔은 내가 내 속을 들여다보며, 나가 이 악당아, 소리 지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 악당의 정체는 멍청하고 질투심 많고 추잡하고 뻔뻔스럽고, 저만 잘 난줄 알고 잔인하고 이기적입니다. 이 악당만 내 속에서 나가면, 세계 평화는 절로 찾아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앞서 열거한 나쁜 감정 중에서, 가장 파괴적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과소평가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질투심입니다. 스피노자가 말했습니다. “질투와 시기는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고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미움이다.” 질투와 시기의 본질이 그처럼 섬뜩합니다. 하지만 누군들 단 한 번도 그런 감정에 휩싸여 본 적이 없노라고 당당할 수 있을까요? 질투와 시기가 파괴적인 이유는, 그 출발이 자신감 없음에 있어서 입니다. 사랑받지 못해서 인정받지 못해서,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가벼운 모욕을 받으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정신과 마음이 나약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자기 존중감이 확고한 사람은, 비록 사랑받지 못해도, 인정받지 못해도, 스스로를 다른 누구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설령 경쟁에선 패배하더라도, 질투심이나 시기심에 패배하지는 않지요. 질투와 시기에 패배하면, 증오와 애착에 휘둘리기 쉽습니다. 그런 모습을 사랑하기란 남은 물론이고, 스스로도 어려워서 점점 더 자신감을 잃는 악순환이 반복되지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게, 자기 존중감이 아닙니다.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가 수 없으며,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판단에 맞추지 않는, 강인하고도 평온한 마음, 그게 자기 존중감입니다.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지요. 다른 사람들한테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 보다, 훨씬 더 소중한 일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4220일 방송>

 

2. 저는 예수님과 얘기를 한 사람들, 가령 제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종종 선문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알쏭달쏭한 미궁으로 들어가는 듯한 생각이 들었을 것인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이사야는 하늘이 땅보다 언제나 높이 있는 이치라고 설명했습니다(55:8-9). 그래서 아무리 얘기를 해도 선문답처럼 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답답한 바리새파 사람들은 네가 누구냐?”는 물음으로 그 심정을 드러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몰랐다는 말이고,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훗날 마가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는 소위 <메시야 비밀> 이라는 암시를 여러 곳에서 제기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하시면서 반드시 이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말씀을 두고 하는 신학적인 용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그리고 미리 말한다고 해도 알아듣지 못할 때문에, 십자가 사건 뒤로 그 의미를 미루었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누구이신가? 이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못하고 살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가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최근 유행어처럼 회자되는 배우 신 구씨의 니들이 게 맛을 알아?”는 광고 문구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을 향해서 니들이 뭘 알아?”와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몰랐던 것은 왤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것만 들으려했고, 알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정작 알아야 할 것, 곧 주님께서 간곡하게 하시는 말씀, 가령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와 같은 말씀, 공동번역에서는 잘 들어라.”는 말씀 뒤에 오는 내용을 귓등으로 흘려보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현대 기독교회의 비극이 있습니다. “아멘, 할렐루야!”를 소리높이 외치는 교회들은 소위 은혜로운 말씀(듣고 싶은 말씀)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금 자신을 향해서 물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그 분을 메시야로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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