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855호(2020. 2. 22. 토요일).
시편 69:3-4.
찬송 15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생시에 골목길에서, 혹은 어느 꿈에서, 후회하고 산다는 사람 만다면 용서해 주게.” 사람이 가장 다스리기 힘든 감정이 억울함과 증오로부터 치솟는 분노입니다. 성인들의 말씀 중에 많은 건 그만큼 용서가 힘들다는 반증일 텐데요. 용서하고 싶은 마음보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더 맹렬하고, 복수하고 싶은데 마음껏 복수하지 못해 더 억울해지고 마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보면, 한번이라도 진정한 용서를 한 적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존경 받을 만하다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어느 용서든 용서의 크기나 무게는 똑 같다면서, 내가 용서하면 신은 나의 잘못을 두 가지 용서한다는 말씀으로 역시나 용서를 강조하셨는데 요. 용서하기에는 심리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강조하는 심리치유의 조건입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용서에는 자신의 실수에 대한 용서와, 자신에게 상처를 준 타인에 대한 용서가 모두 적용됩니다.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죄의식 때문에 영원히 짓눌려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마음에 아직도 풀지 못한 분노로 가득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내적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으며, 다른 사람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거나 더 큰 세상으로 나가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오스카 와일드는 특유의 어법으로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항상 적을 용서해라. 그것만큼 적을 짜증나게 하는 건 없다.” 재미있는 방법이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진정한 용서는 아닐 것 같지요. 그가 용서에 대해 남긴 결정적인 한 마디는 이겁니다. “성인(聖人)에게도 과거가 있고, 죄인(罪人)에게도 미래가 있다.” 성인도 과거엔 죄인이었고, 죄인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슴을 쿡 내려놓게 하는 한마디인데요. 우리 모두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또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은 용서에 있습니다. 용서하기로 마음먹으면 용서할 수 있는데, 그런 마음먹기 싫어서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만큼 미워했으면 이젠 이렇게 할 만합니다. “생시에 골목길에서 혹은 어느 꿈에서 후회하고 산다는 사람 만나면 용서해 주게.” 그 사람이 나 자신일 수도 잇고, 타인일 수도 있습니다. 후회하며 산다고 합니다. 이제 그만 용서해 주라고 합니다. 마종기 시인이 전하는 시구가 아릿합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4년 3월 19일 방송>
2. “나사로의 죽음(1-16절)”을 읽었습니다. 예루살렘 동남쪽 3km 지점에 베다니란 마을이 있는데, 그곳엔 예수님을 지근거리에서 따랐던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오라비인 나사로도 예수님과는 매우 절친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아 준 일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이 집의 손님으로 방문하신 것은 매우 특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막 11:1, 마 21:17). 그녀들의 오라비 나사로가 중병에 걸려 주님의 도움을 받고자 하였는데, 주님께서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이틀이나 더 머무신 후에 방문하셨는데, 그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뒤였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그를 사랑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내가 가서 깨워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나사로가 죽었다 분명히 말씀하신 후, 내가 거기 있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잘된 것이다는 알 듯 말듯한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죽음을 대하는 주님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죽음을 앞에 둔 우리 인간들이 절망에 빠지는 것과는 달리, 주님은 예정된 일상을 계속 진행하신 것(6절), 나사로가 죽은 것을 말씀하시면서도 잠들었다고 하시며 깨워야겠다고 하신 점입니다(11-14절). 그동안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써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심각한 곡해를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죽음을 절망과 비극으로 대한다는 점입니다. 죽음이 기독교 신앙의 최종 목표인 영생에 이르는 관문(關門)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넘어 절망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은 물론 영원한 생명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의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자원해서 당당하게 걸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이 가르친 신앙대로, 죽음 역시 영원한 삶에 이르는 과정의 일부라고 말입니다.
3. 신천지가 결국 엄청난 바이러스를 퍼트리고 말았습니다. 차제에 자정능력이 없는 교회를 대신해서, 사회가 개입해서라도 부도덕하고 비밀집단인 신천지를 정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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