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043(2023. 5. 25. 목요일).

시편 시 140:9-10.

찬송 20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으로 유명한 김광섭은, 사물에 대한 철학적 통찰력을 시를 통해 담아냈습니다. 병마와 가난과 싸워야 했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김광섭의 시는 늘 따뜻했습니다. 어떤 이는 그런 그를 두고서 지나친 낭만주의자라 비판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낭만주의자였다고 했더라도, 그 현실에서 벗어난 글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현실은 마치 괴물 같다 말할 정도로 그를 옥죄었지만, 시 안에는 늘 건강한 생명력이 넘쳤지요. 마치 생의 희로애락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잡는 사람, 노래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나리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시인 김광섭은 첫 시집 [동경]으로 문단에 올랐습니다. 방금 들은 시 마음은 1949년 발표한 동명의 두 번째 시집 [마음]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당시 밤마다 마음을 다잡으면서 그 어떤 세상일에도 흔들리고 싶지 않았던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는 시입니다. 광복 전 시인은 주로 해외 문인들의 작품을 번역하거나, 문학 평론을 하는 일에 몰입을 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일을 어려워해서, 혼란스러워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탓인지 이후 발표한 시들에는, 인간관계에서 느꼈던 고독과 비애를 담은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526일 방송>

 

2. “멜기세덱의 사제직3(18-28)”을 읽었습니다. 문학에는 순수 문학이 있는가 하면 참여 문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순수문학론자들은 문학은 시대와 사회를 초월한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어령은 김수영과의 논쟁에서 영광된 사회가 왔을 때 사회 참여의식을 담았던 시는 그 가치를 상실해 버리는 것이 참여시의 운명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처럼 문학이 추구하는 가치를 유효성의 관점으로 봤을 때, 순수문학은 항구적인데 반해 참여문학의 유효성은 시대와 맥을 같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참여 문학은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점을 둡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실존주의 철학의 유입과 민주주의가 억압받는 시대적 상황이 맞물리며 김지하, 김수영, 신동엽 등의 시인이 참여시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까지 독재정권 아래서 문학의 참여적 기능이 강조됐습니다. 김문주(영남대 국어국문) 교수는 시대적 현실이 암울했던 당시 문학의 현실 참여는 절실한 문제였다참여론자들은 사회문제를 외면하고 서정을 노래하는 문학을 현실도피라고 봤다고 말했습니다. 참여문학론자들은 정치적 선동이라는 순수문학론자들의 비판에는 오히려 순수문학이 침묵으로써 기존 질서와 체제를 옹호하고 있다고 반박했습니다.” (박소희 기자, <순수·참여논쟁>, 문학의 본질을 비추다,  2012.10.29. 20:44). 이런 현상은 설교자에게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을 중립적인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고, 현실 참여라는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특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 교회 지도자로써 자신의 시대에 대해서 방관자적인 자세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특히나 문제투성이의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자기 시대에 대해서 책임적인 몸짓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역사참여의 설교를 선호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구절은 “‘너는 영원한 사제다.’ 라며 주님께서 맹세하셨다. 그리고 그 맹세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21)입니다. 이 구절이 품고 있는 의미는 영원한 사제이신 주님이 사제로써의 행위는 시대를 초월해서 보증이 되신다는 뜻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모든 보속(補贖)은 율법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행하신 은총의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며칠 후에는 저의 부친 추모예배가 예정되어 있는데, 그 자리에는 구원파 출신 매제와 근본주의자 출신 또 다른 매제가 있습니다. 이분들에게서 설득이 어려운 대목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믿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거기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5:18)는 구절에서는 절대로 양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주님께서 이 말씀을 산상수훈에서 하셨는가에 대한 배경 이해가 전혀 없이 말입니다. 예나 제나 율법 폐기론자들은 항상 있어왔습니다. 매우 위험한 주장입니다. 율법과 구원이라는 관계를 제외한다면, 율법은 우리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지켜야 할 금과옥조와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설교에서처럼, 율법의 한계 곧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써는 매우 허약하다는 것 또한 분명한 성경의 말씀입니다. 율법을 따라 여전히 죄의 보속을 위해 사제들의 수고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수고로 인해서 우리들이 영원한 죄와 죽음의 사슬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인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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