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67.

시편 119:46-48.

찬송 2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불행한 사람은 갖지 못한 것을 사모하고, 행복한 사람은 갖고 있는 것을 사랑하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 하워드 가드너의 명언이다. 많이 가져도 마음이 여유롭지 못한 사람과, 적게 가져도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 누가 행복한 사람인지, 그리고 누가 불행한 사람인지, 그걸 깨닫고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2. 부활절 다섯째 주일의 사도서간 요한 계시록 21:1-7을 본문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새롭게 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새로운 나라에서 살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나라를 말하며, 또 그 나라는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우리 시대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세상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 합니다.

선거철이면 그 시대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의 기대치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한 때 우리나라는 3만 불 시대를 꿈의 목표로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는 매우 소박한 구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살게 하겠다.”는 아주 평범하지만 원론적인 구호가 그것입니다. 70년대 새마을 구호에서 들렸습니다. 동국대에 양주동박사가 있었는데, 그 분의 주례사에는 잘 먹고 잘 살아라.”는 말이 꼭 들어가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덕담처럼 들리는데 사람들은 크게 웃었는데, 까닭은 제 욕심만 부리는 사람에게 하는 욕설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잘 사는 기준 중의 하나가 잘 먹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적당히, 너무 맵지도 짜지도 않으며, 아무 것이나 덥석덥석 먹지 말고, 이렇게 제대로 잘 먹기만 해도 행복한 세상을 살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밥이 보약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세상이었습니다(1-4).

성경에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세상을 섭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살피시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온갖 문제들로 고통이 가득합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악마/사탄이 침투했다 말씀하십니다(3:1-21). 물론 악마의 기원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만 악마가 하는 일, 인간을 유혹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을 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문제를 더 많이 일어나게 하는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일인데, 곧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사랑과 자비는 풍성하지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일만 남아 있다는 것이 유대교의 쉐마가 가르치는 중심점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세상이었습니다(5-7).

새로운 세상을 말씀하시는 성경은, 재창조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천국 문 앞에서 한국 여인들 때문에 긴 줄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얼굴을 대조/對照하는 천사들이 한국 여인들이 공사/工事를 너무 많이 해서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완전히 다른 창조나 재창조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없는 세상이고, 병든 사람이 없는 세상입니다. 압제자가 없는 세상이고 기우러진 운동장이 없다는 말입니다. 맹수들이 어린 사슴과 토끼와 어울리는 나라가 되도록 고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제자리를 잡는 작업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들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 땅위에서의 노력은 불완전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평화와 감사 그리고 기쁨으로 가득 찬 예상 가능한 나라를 꿈꿀 수 있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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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66(2025. 5. 17. 토요일).

시편 119:46-48.

찬송 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 사람은 방법을 찾아내고, 아무 것도 하기 싫은 사람은 구실을 찾아낸다.” 아랍 격언이라고 한다나는 지금 방법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회피할 구실을 찾고 있는가? 출발점은 비슷하나, 종착점은 엄청 크게 다르다.

 

2.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칙2(12-17)”을 읽었습니다. 흔히들 유대인을 자칭 타칭 선민/選民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여러 민족 가운데서 뽑아 주신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12:1-4). 이에 대하여 크리스천들 역시 자칭 타칭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백성이라고 부릅니다(5:32, 3:1).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불렀습니다(교회/ Εκκλησια - εκ καλεω). 그러므로 선민이라는 말과 부르심이라는 말은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낱말은 하나님이라는 절대자가 주체가 되셔서 중심을 잡고 행동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선민이라는 말과 부르심을 받은 교회라는 말은, 다른 용어의 같은 뜻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크리스천들은 몇 가지 실천해야 할 덕목이 있는데, 첫째는 서로 돕고 서로 용서하는 일이라 권고합니다(12-13). 서로 돕는다는 말은 서로의 연약함을 붙잡아 주고, 허물은 감싸 안아 주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사랑을 실천할 것을 권고합니다(14). 사랑의 힘은 부족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보다 완전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권고합니다(15). 때로는 혼자 사는 것이 가장 편하고 좋을 것으로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곧 바로 외로움의 슬픔을 깨우칠 것입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서로 감사하는 일입니다. 함께 있어서 감사하고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성한 삶을 살기를 권고합니다(16-17). 어느 연로한 논객에게 힘들고 어려울 때 가장 도움을 받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분은 어떤 사회학자의 책을 소개하며 그걸 읽고 평점심을 찾고 지혜를 얻는다 했습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큰 위로와 용기 그리고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어느 마을이나 길냥이와 떠돌이 개로 인해서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저의 마을에도 떠돌이 개 한 마리가 언제부터 돌아다니고 있는데 씻지를 못해서 더럽고 비쩍 말라 있어서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주려고 내 밀면 멀리 도망을 갑니다. 엊그제는 차를 타고 가다가 만났는데, 마침 토스트 빵을 두어개 던져 주었는데, 먹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강아지들이 잘 먹는 먹이를 그릇에 담아 대문 앞에 두었는데, 깨끗이 비운 것을 보았습니다. 데려다 키울 형편이 아니어서 물과 음식을 나눌 생각입니다. 우리 인간들 뿐 아니라, 짐승들도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든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서로 돕고 사랑하고 서로 감사하고 서로 풍성한 삶을 위해 지혜를 나눌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텐데, 그걸 모를 리 없는 우리 인간들이 행동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이 강퍅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욕심이 가득차서도 아닐 것입니다. 마음에 여유로움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생각, 내 목표, 내 삶으로 가득 차 있어서 마음이 분주하고 번거로워진 것입니다. 가끔 하늘을 올려다 보라시던 어느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가끔은 저 멀리 산도 보고, 나무도 보고 새들도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그것 역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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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65(2025. 5. 16. 금요일).

시편 119:43-45.

찬송 34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올해 91세가 된 셜리 맥클레인은 미국인 배우로, “나는 기적의 힘을 사랑한다. 그리고 어려움에 놓였을 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는 명언을 하였다. 기적은 생각보다 많이 일어난다. 기적을 경험하려면 기적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할 자신만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희망씨, 가슴에 새기는 한 줄 명언, p.73.

 

2.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칙(1-11)”을 읽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질문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요즘 눈에 많이 띄는 글들은 특히 나이든 분들의 주장은, 누구도 의지하지 말고 특히 자식도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라고 말합니다. 나이 들어 보니까 서러운 것도 많고 배신감도 많이 든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젊은 날에는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고 하면, 노년에는 자신을 돌보면서 살라고 합니다. 부모를 홀대하는 자식들의 얘기가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참 못된 사람들이다 싶으면서도, 그들의 진심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살아가는 것도 힘겨운데, 부모님이 무거운 짐처럼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부모님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잘 알고 있는데 어떻게 홀대하고 구박할 수 있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엊그제 신문에서도 좋은데 놀러가자고 모셔간 홀어머니를 공항에 버린 아들 얘기가 있는가하면, 아들 며느리가 짜고 요양원에 버린 얘기도 들려옵니다. 비정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도 효도하는 아들과 며느리를 칭찬해 온 것은 그 시절에도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더 나빠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시대는 달라도 부모 마음과 자식 마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부모는 열 자식을 돌봐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돌볼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찌하겠습니까? 내리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모에게는 소홀해도 제 자식에게는 끔찍한 것으로 고맙게 생각해야 하겠지요.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몸은 땅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하늘에 두고 살라 하십니다. 참 어려운 일로,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은 것과 진배없다는 말씀입니다(1-4). 둘째는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라 하십니다(5-8). 많이 가지려고도, 높이 오르려고도 말라는 뜻입니다.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까닭입니다. 셋째는 거짓말로 서로 속이지 말라 하십니다(9-11). 거짓말은 자기 부정입니다. 자신의 선함과 진실함이 거짓말과 함께 사라져버리니 말입니다.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 세상 사람과는 다르게 살라고 하니, 이런 사람이야말로 미친 얘기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제 스스로는 똑똑하다 하는데, 바보 멍청이가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살이와 절연하고 깊은 산속으로나 아무도 찾지 않는 사막으로 떠나 살게 된 은둔자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도 아니면 세상살이의 일반적인 루틴을 부정하고, 수도자가 되거나 독신자 또는 결혼을 포기하는 성직자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이런 세속 한 복판에서 독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높은 바위 위에서 혹은 사막 한 가운데서 은둔자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삶일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매일 전쟁터를 불사하는 시끄럽고 울고불고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평범한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삶이, 그러니까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이 가장 힘겨운 고행일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저의 집 울타리에는 빨간 색 크레졸 병을 여러 개 매달아 두었습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뱀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볼까 해서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공존해야 한다면, 피차 경계를 정하고 평화협정을 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주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켜주시기를 구하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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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64(2025. 5. 15. 목요일).

시편 119:40-42.

찬송 24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소크라테스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분임은 나는 내 자신을 모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객관적인 잣대와 기준이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장점도 단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때문이다. 이를 어쩌나?

 

2. “세속의 유치한 원리에 대한 경계(6-23)”을 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1세기의 기독교 공동체는 아직 일반 평신도들이 성경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사도나 다른 선배 교우들이 들려주는 구전/口傳에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전 교우들은 기억력이 유난히 좋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는 21편의 서신들은 대부분이 당시에 흔히 사용하는 구어체이고, 그 기록물들 역시 가장 쉽고 많이 사용하던 코이네/Κοινή였습니다. 주후 1453년까지 공식적으로 사용되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지방에서 많이 사용하던 그리스어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몇 가지 권고사항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6-7). 그것은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위에 살아가는 일인데, 다름 아닌 말씀을 기억하며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유명인사는 구약을 통째로 암기한다는 말을 했다 하는데, 실제로 감리교회 소재송 목사님이 그런 분이라고 해서 기자가 물었는데, 창세기로부터 외우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주요구절을 취사선택해서 외우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진정한 할례인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8-13). 유대인들은 할례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식을 갖는데, 이와 유사한 기독교회의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고, 그분의 공로로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받은 세례를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신앙의 척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 된 빚문서를 무효화시키셨다는 것입니다(14-15). 십자가의 진리를 깨우치기까지는 우리는 항상 죄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참 자유하게 되었다는 진리를 믿어야 하겠습니다. 넷째는 형식적인 신앙생활, 곧 먹고 마시는 문제나, 절기와 안식일을 지키는 등의 문제로부터 진정성 있는 신앙생활로 전환할 것을 말씀합니다(16-19). 형식적인 신앙생활에도 가치는 있지만, 그것은 겸손을 가장/假裝한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섯 번째 결국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 살아가는 세례의 삶이 요체라 하겠습니다.

    어느 강습회 자리에서 백발이 성성하신 목사님이 손을 드셨습니다. 성경에서는 기도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하는데,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납득이 안 된다는 질문이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매우 조심해야 하는 것은, 문자주의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언어생활에서 충분히 검증이 되는 일입니다. 어떤 주제로 설교를 한다거나 강의를 할 때, 중요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악센트를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저는 여러 해를 여러 종류의 가정교사를 했었는데, 주의가 산만한 학생에게는 소위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선생님을 주목해 보는 일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주목해 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에 해당되고 있습니까? 집중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절을 일반화시켜서 어디에나 인용한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책읽기를 가르칠 때는 매 단락/paragraph 마다 요점을 적어두게 했습니다. 그리고 한 단원을 정리할 때는 그 요점들을 연결 지어 맥락을 찾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뜻은 살 전 5:16-18에 나오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만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수백 가지의 하나님의 뜻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을 앞에 두고 하신 기도에는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22:42)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모든 말씀은 그 맥락 혹은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Text in Context).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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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63(2025. 5. 14. 수요일).

시편 119:37-39.

찬송 5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며 정신과 의사인 카를 융은(1875.7-1961.6) 아주 귀한 명언을 남겼다. “무의미는 인생이 꽃피우는 것을 억눌러 결국에는 병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의미 있음은 모든 일을 참고 견디게 해준다.” 그래서 지혜롭게 인생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 항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삼는다.

 

2. “교회의 일꾼 바울(24-2:5)”을 읽었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 전도한 친구가 장로가 되었습니다. 제가 고향을 갔을 때, 고향 교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친구 마을의 교회 장로님이 되신 것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기뻤는데, 몇 번째인가 부터는 무슨 논쟁 대상이라도 만난 양 교회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고 공격적이었습니다. 화도 나고 만나는 것이 꺼려졌지만 생각해 보니 그를 전도한 책임을 끝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샛말로 하면 A/S를 해 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몇 가지 문제점이 분명했습니다. 첫째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성경 연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판에 박은 듯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전도에 게으르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바쁘기는 한 것 같은데, 집안 살림과 취미생활에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도시의 대형교회의 목사들을 부러워하며 닮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골의 작은 교회 목사로 교인들을 수송하는 승합차로 만족하지 못하고 개인 승용차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대원생들을 지도할 때, 신세계인가 대형 백화점에서 영업부를 맡았던 이력이 있는 나이든 학생이 졸업을 하고 교회를 개척해서 그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막 개척한 교회인데도 불구하고 목사님이 승용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제게 참고하라며 일러준 말은 현대 교회는 갖춰야 할 것은 다 갖춘 교회를 교우들이 선호한다며, 피아노, 에어컨, 냉장고, 컴퓨터, 자동차 등등을 얘기했습니다.” 일리는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교우들은 시작하는 교회가 시작하는 교회다워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목회자 부부가 개척교회를 위해서 합심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모는 중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목회에 목숨을 걸고 일하는 그런 목회자를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장로 친구를 만나는 것이 두려워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일꾼으로써 자신을 예로 들어 몇 가지를 권고합니다. 첫째 교회의 일꾼은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24). 둘째 교회의 일꾼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25-28). 사도는 이 대목에서 아주 많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교회의 일꾼이 존재하는 이유를 밝힌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인건 이방인이건 모두가 복음을 듣게 될 대상들이었습니다. 셋째 교회의 일꾼은 일면식도 없는 골로새 교우들 뿐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우들에 대해서도 이 말씀을 전하고 싶은 진정성을 밝히고 있습니다(1-3). 넷째 교회의 일꾼은 바른 복음과 거짓 복음을 분별할 수 있기를 가르쳐야 함을 밝히고 있습니다(4-5). 1세기 초대 교회 안에는 이단은 물론 도덕주의자나 율법주의자 등의 거짓 교사들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21세기인 우리 교회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위해서 교회에 침투한 세력들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집단들이 문선명의 통일교회나 박태선의 천부교 그리고 이만희의 신천지와 같은 집단들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왜곡하고 있으며, 죽지 않고 영생할 것이라든지, 부자가 되어 근심 걱정 없는 삶을 살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가장 쉽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가르치는 근본주의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일꾼은 주를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고난을 감수하는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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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62(2025. 5. 13. 화요일).

시편 119:34-36.

찬송 10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레바논의 시인 <예언자>의 저자 칼릴 지브란은 낙관주의자는 장미에서 가시가 아니라 꽃을 보고, 비관주의자는 가시만 본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데는 육신의 눈보다는 마음의 눈이 중요함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2. “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15-23)”을 읽었습니다.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우리 인간으로써는 신앙적인 문제들까지도 이성적으로 다시 말하면 설명이 가능한 듯이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물론 무식한 사람처럼 무조건 믿으면 좋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길에 들어서기를 꺼려하고, 불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도덕과 윤리적인 차원에 머무르기 때문에 그들이 가르치는 경전에서는 이렇듯 설명이 가능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경을 보면, 도덕과 윤리적인 주제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도덕과 윤리가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서, 혼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가령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율법에 관한 가르침에는 도덕과 윤리를 훨씬 더 넘어서는 깊은 진리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1-22) 그러니까 형제(친 형제만이 아니라 일반인)에게 화를 내거나, 몹쓸 욕설을 퍼붓거나 미련한 놈이라 비웃어도 살인죄에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8) 이 말씀에 의해서 가십을 늘어놓으며 낄낄대는 예능 출연자들은 모두 간음죄의 처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해 아래 한 인간도 죄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일반 종교에서는 이런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범하지 않는 경우에는 누구도 죄를 고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회에서는 이런 죄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구세주라는 인물이 세상에 등장한 사실을 알리고 그가 세상의 모든 죄를 보속/補贖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고, 우리가 그 분이 행하신 일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의 길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진리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중심사상은, 세상에 오신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신앙 고백이라는 말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어떤 논리나 설명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항상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이 신앙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이 신앙에 다가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신앙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교파마다 여러 종류의 신앙고백서들을 소개하고 있고, 신앙에 이르게 하는 가시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실증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나 희랍 정교회 등은 이른바 역사와 제도라는 측면에서 많은 강조점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성자 숭배사상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런 역사적 제도는 기독교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고 흔들리는 믿음을 단단히 붙잡아 주는 눈에 보이는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가 나의 구주가 되신다는 신앙의 중심 성을 잃지 않고 견지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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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61(2025. 5. 12. 월요일).

시편 119:31-33.

찬송 4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의 저자 로버트 프로스트는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곳을 빠져나가는 최선의 방법은 그곳을 거쳐 가는 것이다.” 피하지 말고 정공법을 선택하라는 말로 들립니다. 당당하게 모든 문제와 맞서는 자세가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2. “인사(1-2)”, “바울의 감사(3-8)” 그리고 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9-14)”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셋째 단락입니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골로새서는 바울에게는 조금 특별한 서신입니다. 바울 자신이 개척하지 아니한 유일한 그의 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골로새 교회는 바울에게는 매우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였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를 병간해 주던 에바브라가 그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안의 어려운 사정을 바울에게 많은 시간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이해를 가지고 오늘 본문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기독교인으로 신앙생활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오해하는 부분이 하나님 이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민간신앙이 뿌리를 깊게 내린 사회에서는 하나님을 사람보다는 조금 우세한 힘과 지혜를 갖고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진안에 가면 마이산이라는 신기하게 생긴 두 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곳에는 이갑용이라는 도사/혹은 처사가 80여기의 돌탑을 쌓았는데,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전봉준의 농민반란으로 나라가 뒤숭숭할 때,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기도하며 돌탑을 쌓았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돌탑에 사용된 돌들은 그 지방 돌이 아니라 동해안에서 가져온 것으로, 그 처사가 축지법을 사용해서 하룻밤에서 몇 차례씩 동해안을 다녀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지방에 사는 분들 중에는 이런 전설 같은 얘기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향해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가르쳐야 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단순히 인간보다 조금 우월한 능력을 가진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그분을 부활의 첫 열매로 삼으시고 하늘나라로 옮겨주셨다고 말입니다.

    사실 기독교의 복음을 세상에 전달하는 과정에 있어서 항상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는 타종교가 절대자로 한 분을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기독교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을 전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부와 성령에 대해서는 일반 종교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고 하지만, 성자에 대해서는 그분이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매우 복잡하게 생각하는 경향 때문에 어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아마도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인지 오늘 본문은 매우 헬라 철학에 영향을 많이 받은 소아시아 지방의 골로새 사람들에게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라는 점이며, 둘째로 성자 그리스도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존재하셨다고 말합니다. 셋째로 만물은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 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성자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점입니다. 다섯째로 성자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시작이며 만물의 으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은 이성의 차원이 아니라, 신비한 차원이라고 하겠습니다. 누구나 믿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식으로 표현하면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감화 감동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이르렀다고 하면 이보다 더 큰 은총은 없다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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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60.

시편 119:28-30.

찬송 21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윤동주가 사랑했던 시인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Paul Valery(1871-1945)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한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2. 부활절 넷째 주일의 행 20:17-35을 본문으로 바울의 고별 설교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무엇이든 마지막이라는 말이 붙으면 까닭 없이 숙연해지고 머뭇거려집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유언과도 같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에서 밀레도까지는 약 45km나 되는데, 장로들을 밀레도까지 불러서 고별설교를 한 것입니다.

 

바울 선교의 처음과 나중에 깊이 관여한 분들 앞에서의 고별설교였습니다(17-24).

유서를 써 보신 분들이라면, 그 대상은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뜻을 같이 했던 동지가 첫 대목에 오를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사도는 그들이 자신의 선교에서 겪었던 기쁨과 눈물의 의미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들을 추억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들의 음모로 인한 시련이었으며,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회개의 설교를 했던 것도 추억했습니다. 셋째는 성령의 지시로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계획이 매우 위험한 것인지를 알리고 있습니다. 넷째는 사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의 무엇이며, 그 중대성에 대해서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충실하게 짊어질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고별 설교는 시종여일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결연한 삶의 여정을 알리고 기도의 도움을 받으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짊어질 고난의 멍에를 피하지 말자고 권고합니다(25-35).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만사형통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달랐습니다. 저의 집에서 1km 떨어진 아산 패밀리 풀장 옆에는 오석비문이 있는데, 프랑스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지 1년도 안 된 젊은 신부님이 순교지로 끌려가면서 쉬었다는 기념비입니다. 수년을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서품까지 받은 신부님이 채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가까운 가족들에게서부터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백해무익하다는 평가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현대 목회자들이 명심해야 할 경구입니다. 어둠 속에 유폐되어 복음의 가치가 높이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돌봐야 할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말씀으로 이 시대의 가슴들을 태워야 하는 때문입니다.

 

설교자인 사도와 그곳에 있던 장로들은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36-38).

나이 탓인지는 몰라도 복음을 전하는 도중에 죽을 수 있으면 영광스럽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중국에서 그리고 베트남에서 현지 목회자들을 가르치다가 공안의 습격을 받아 정신없이 도망가던 일화들이 있습니다. 기쁨에 넘친 젊은 전도사님들이 신학교 기숙사에서 조반을 먹기 전에 마을을 돌며 찬송을 불렀던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제가 강의하는 시간을 노려서 6명이 강의실로 습격한 것입니다. 저는 외국인이어서 쉽게 체포는 못하고, 현지인들만 6명을 체포해 갔습니다. 그 틈에 내몽고로 피신을 해서 그곳의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베트남에서는 현지 교회지도자의 친 동생이 공안에 고발을 해서 그들이 교회당으로 밀어닥친 것입니다. 다행히 사전에 입수한 정보로 저와 통역은 호치민으로 가는 일반버스로 탈출할 수가 있었습니다. 세상은 복음을 필요로 하고 있지만, 거부하는 세력은 여전히 강한 힘으로 장벽을 치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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