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변호사님께.
사랑하는 K 변호사님.
오랜만에 편지를 쓰는데 좀 어색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주 얘기도 나누고 글도 써야 친화력이 있다는 말, 느낌이 옵니다.
요즘 상해 생활은 어떠신지요?
차마 궁금하지만 묻지 못한 것은 그 대답이 제 기대와 다를 때 질문을 후회할 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뜻밖의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날 벼락을 맞은 느낌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까마귀 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말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초록이 동색이라는 말도 새겨 들어야 할 말 같습니다.
제가 우리 주님을 좋아하는 이유가 게 있습니다.
웃는 자와 그리고 우는 자와 이웃이 되기를 기뻐하셨으니까요.
오늘은 제가 금년에 부름을 받고 설교하게 될 시각 장애인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매월 셋째 주일은 시각 장애인 교회에서 설교 봉사를 할 예정입니다.
이미 작년 11월에 약속을 해 두었고 12월엔 교회 주소와 이런저런 정보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달 전화를 드리니까 목사님 대답이 풀 죽은 소리였습니다.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면서, 장안평이 아니라 화곡동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이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뻔한 얘기가 들려올 것 같아서 목사님 체면 생각해서 더는 묻지 않았습니다.
1980년 초 저는 부산 YWCA에서 성경반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생존하시던 풀무원 원경선 선생님이나,
청십자운동을 하시던 의사 장기려 박사님을 강사로 모신 것도 잘 한 일이지만,
한 시각장애우 대학생의 권고로 <등불회>를 조직해서 자원봉사자를 양성한 것은 참 잘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 점자를 찍는 일이나 녹음을 하는 실제적인 일에서부터
장애인들이 겪는 차별에 대해서 가슴아픈 이야기들을 듣고 깨달았던 기억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 뒤로 이런저런 일로 시각장애우 목사님들과 청각장애우 목사님들을 가르치게 됐고,
그 인연으로 장애우 교회에서 설교할 기회가 자주 주어졌습니다.
어느 핸가는 대전에서 열리는 하계 전국 시각장애인 목회자 수련회 강사로도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배웠습니다. 장애인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이 차별이라고 말입니다.
얼마 전에는 장애인 학교를 지으려는 것을 결사반대해서
결국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알게 된 것입니다. 쫓겨났구나.
장애인이 모이는 곳은 그곳이 학교든 교회든 무조건 혐오시설이 된다는 것을.
그것은 집 값이 떨어지는 것과 직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1년은 멀쩡하게 차려입고 다니니까 전혀 눈치채지를 못해서일뿐,
차별받는다는 생각없이 청각인 교회를 다녔는데,
올 해는 벌써부터 마음에 무장을 해야 하겠습니다.
혐오시설에 다니는 목사로써 결사반대하는 이들과 싸워야할 테니 말입니다.
사랑하는 변호사님.
우리는 2001년부터 2013년까지 중국 선교사와 후원자의 신분으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한 일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저는 수동적이었고 당신은 능동적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북한 공산정권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통일이 될 때 파생될 혼란과 어려움을 대비하자고 말입니다.
당신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격차가 큰 남한과 북한을 서서히 통합하기 위해서는
완충작용이 각 부문에서 준비되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교회도 그 일환으로
남한 교회 지도자보다는 중국에 있는 조선족 교회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말씨와 문화가 너무 다를 경우에 복음을 전달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로 하여금 중국에 흩어져 있는 조선족 교회 지도자들을 육성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들이 북한 지역교회를 맡게 하자고 말입니다.
그 후 제가 동북 3성이 있는 최 북단의 흑룡강성의 제2도시 치치하얼에서
신학생과 현지 목회자들을 가르칠 기회를 얻은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26차례 세미나를 가졌는데 월요일에 서울을 출발 저녁 해질 무렵이면 목적지에 도착해서
이튿날 화요일 오전 9시부터 금요일 저녁 9시까지 4일간을 강행군을 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새벽 기차를 타고 하얼빈 공항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매번 저의 강의는 뜨거웠습니다. 학생들도 뜨겁게 반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지의 현실은 너무 열악해서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학생들 가운데는 대부분이 어려운 처지에서 목회자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10시간이상 기차를 타고 오는 분들도 있었고 제대로 된 필기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들의 차비도 준비해야 했고, 볼펜과 노트도 준비해야 했습니다.
물론 세미나 기간 동안에 학생들의 숙식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 때 현지 멘토의 요청을 당신께 전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당신은 그때마다 기쁘고 기쁜 마음으로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제 일정을 고려해서 1년에 4회를 계획하고 진행한 것입니다.
제가 오늘 변호사님 얘기를 꺼낸 것은
선교지의 얘기만이 아니라,
선교지에서 연을 맺은 학생들과, 또 그 학생들의 가족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런 분들까지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습니다.
학생 중 한 분은 자신의 모친이 한국을 방문 돈벌이를 하다가 불법체류자가 되었고,
그 쫓기는 와중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갈비뼈가 9대나 부러졌고, 앞 이빨도 7개나 부러졌습니다.
아는 이 하나도 없는 황량한 서울 대림동 성모병원에서 그 분을 만났습니다.
보험회사 직원은 불법체류자임을 강조하며 치료도 대충 끝내고 추방조치하려고 했습니다.
이럴 경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보험회사 직원을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환자를 제대로 치료받게 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 당신은 어려움을 겪는 제게 선교지에서 알게 된 이들이 한국에서 일을 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후원금을 보내겠다고 한 것입니다.
매달 30만원이 그 뒤로 약 7년동안 들어오게 된 배경입니다.
그 뼈와 이가 부러졌던 환자는 보험회사와 잘 중재해서
갈비 뼈와 이까지 완치했고, 상해금으로 1천만원을 받는 것으로 종결되었습니다.
부지런히 여러 병원을 뛰어다니고 치료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게 도움이 된 것입니다.
그 후에는 한국에 유학중인 조선족 학생의 생활비로 대부분의 후원금을 지불했습니다.
물론 모든 일은 서로 상의하고 합의한 후에 진행했었지요.
당신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월급도 많이 올려주셨다고,
성과급도 받았다고 저를 안심시켜주셨습니다.
저는 금전처리에 관해서만은 철저하게 기록으로 자료화 했습니다.
통장을 통해서 입출금을 관리했는데 훗날 법원에 제출할 정도로 요긴하게 사용했습니다.
사랑하는 변호사님.
당신에게는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셨고, 제게는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는 가슴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 저는 많은 아름다운 추억들을 가슴에 품고 황혼녁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 소중한 사람들 중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느 돈 많은 의사에게 값지게 돈을 쓰는 방법을 안내해 준 일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니까, 젊은 신학도들을 위해서 기부하는기회를 말입니다.
그래서 8년이나 학교 이사장직을 맡게 되었는데, 그 8년동안에 2천만원을 기부했다 들었습니다.
명예만 누린 셈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더욱 더 돋보입니다. 당신은 이름없는 한 사람으로 선교지의 지도자를 위해서 교육비로
시설유지 보수비로 그리고 차량 구입비로 1억원이 훌쩍 넘는 엄청난 후원을 하신 것입니다.
그 일에 제가 증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시각장애인 교회로 나가게 됐다고 인사를 하자,
1년동안 설교했던 청각인교회 목사님이 당신 도움이 필요하면 주저말고 얘기하라 하십니다.
말씀만으로도 힘이 불끈 솟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청각장애인들에게도 끊임없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데 말입니다.
엊그제 세 분의 시각장애인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달려가서 같이 걷자고 얘기해 주고 싶었습니다만 낯선 분들이 놀랄 것 같아 그만두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쓰겠습니다.
건강하시기를 기도하며 하루 속히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오길 기도합니다.
서울에서 박성완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