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목사님께.
오늘 도봉산 둘레길 산책에 동행할 분들을 수 소문했지만 선약들이 있어서 나홀로 가야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산책이란 혼자 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처럼 사색도 하고 자연도 관찰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가는 도봉산 산책로는 제 나름으로 두 군데 휴식처를 정해 두었습니다.
한 곳은 오르막 비탈길 중간에 있는 곳인데, 가뿐 숨도 쉴겸 커피 한 잔 마시기에 딱 좋은 곳입니다.
그곳엔 네 개의 벤치가 있는데, 항상 만석이 되곤 해서 운이 좋아야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딱 한번을 제외하고는 첫번째 휴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휴식처에서는 많은 이들의 수다를 엿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참 좋은 곳입니다.
대부분의 수다는 그게 남자건 여자건 제3의 인물이 대상이 되곤 합니다.
오늘은, 왜 사는지 몰라라는 물음이 몇 차례 나왔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가지 조건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인색한 분이 오징어가 되었습니다.
왜 사는 것일까?
그 많은 돈을 가지고도 쓸 줄도 모르고, 나눌 줄도 모르고, 살고 있는 분 같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는 이유가 돈을 쓰기 위해서이고, 돈을 나누기 위해서인데 움켜쥐고만 있으니,
관속에 넣고 가려나 같은 얘기처럼 들렸습니다.
산책 내내 이 질문이 머리속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왜 사는 것일까?
좀 더 확대하면 왜 믿는 것일까? 왜 싸우는 것일까? 왜 욕심을 채우려는 것일까?
그런데 제게 바쁘다고 산책을 다음으로 미룬 한 분은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질문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왜 부흥회를 하는 것일까? 물음은 끝도 없이 확장될 것 같습니다.
A 목사님 !
저는 왜 부흥회를 하는 걸까? 이 질문이 제 마음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그 많이 걸렸던 부흥사경회 현수막을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질 않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부흥사경회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생경하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41년간 전임전도사, 준목, 그리고 목사로 일하는 동안
열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아주 적게 부흥회를 주관했던 것 같습니다.
부흥회에 대해서 저 나름 알러지 반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흥회란 부흥강사를 초청해서 그 분에게 다 맡기는 몇 일동안의 교회 행사를 말합니다.
부흥회를 통해서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려는데 목적이 있다고 얘기하는 분도 있고,
이른바 심령이 변화되어서 교회와 세상을 바로 섬기는 교인들을 만들려는데 목적이 있다고도 합니다.
한가지 공통점은 외부로부터 어떤 충격적인 요법으로 교회와 교인들을 변화시키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담임 목사의 판에 박은 듯한 설교에 진절머리가 난 교인들에게 신선한 말씀을 제공할 수 있고,
교인들이 합심협력하는 계기가 되어서, 교회가 목표하는 사업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는 담임목사에게 긴장하게 하고 더 열심히 교회를 부흥시킬 자극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목표가 부흥회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산책에서 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부흥회가 어떤 모양이든 자신의 신앙적 현실을 파악하거나, 자극을 받는 효과는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식의 부흥회는 진정한 해답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부흥회가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으로 발전해서 지금처럼 회피하는 행사에 이르렀으니 말입니다.
저는 충격요법에 해당하는 부흥회보다는 오히려 생활신앙 쪽에 더 비중을 두었으면 생각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신앙인이건 일반인이건 간에,
인격이 변화하고 삶이 바뀌지 않는 한은 진정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흥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 아멘, 할렐루야는 너무 부정적 측면이 많습니다.
오랜 전에 제가 목욕 봉사자들을 운전할 때의 경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의탁 노인들 수용소를 찾아가서 목욕봉사를 하는 활동을 했는데,
낯선 분이 끼어 있어서 제가 자신을 소개하시면 좋겠다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자신을 천주교회 신자라면서
신부님께서 지난 주일 설교에서 누군가를 섬기고 오라고 명령하셔서 이곳에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분은 신부님의 설교의 연장선상에서 봉사활동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일 예배에서 끝나버린 설교가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 그 주일 설교는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요즘 제가 설교하러 가는 교회의 한 남자 집사님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신앙과 생활이 완전히 따로인 것처럼 살고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신앙과 생활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한 몸의 두가지 삶을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 결과 기독교인 지도자로 가득한 한국 땅에서 온갖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삶이 따르지 않는 신앙을 무슨 말로 변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부흥회로 돌아가서,
우리 목사님들의 설교가 교인들의 삶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면,
부흥회를 더욱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생활은 따로 국밥처럼 겉도는 모습이 아닐까 안타까운 마음이 떠나질 않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부흥회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A 목사님 !
목사님도 고민해 보셨으면 해서 몇 자 써 봤습니다.
평화 !
박성완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