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없는 편지

K 선배님께.

박성완 2018. 4. 3. 07:07

어제는 도봉산 둘레길을 산책하였습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도봉 서원>터가 나오는데 요즘 복원 작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아래 김수영 시인의 시비 <풀>이 서 있는데,

저는 가끔 그 시비에 다가가 시구절을 읽곤 합니다.

풀을 우리들 이름없는 백성들을, 바람을 거대한 당대의 권력을 상징했다 합니다.

바람이 불면 풀들은 납작 엎드리는데, 곧 바로 일어난다는 관찰이 마음을 시리게 합니다.

서울 미래유산 2013-40호로 안내석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내려오면 이병주 선생의 산문에서 따온 글을 비석에 새겼습니다.

북한산에서 생의 이전과 이후가 확 달라진 전환점이 되었다는 글인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친구의 배신에 앞서 자신이 먼저 배신했다 고백하고,

연인의 변심에 앞서 자신이 먼저 변심했다 고백하는 대목에서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내쪽이 먼저 빌미를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S 선배님.

저는 요즘 신앙의 성장에 대해서 많은 회의를 갖고 있습니다.

제 자신은 잘 보이지 않아서 관대한지 모르겠고,

제가 몇 년 동안 공들여서 돕고 있는 목사님들이 계시는데,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뭉그적 거리고 있는게 속이 상합니다.

부지런히 이리저리 뛰어 다니긴 하지만 변화가 전혀 없어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중국 어느 시골에서 만난 가정 교회와 베뢰아 교회가 스쳐지나갔습니다.

그 중국교회는 아주 젊은 신혼부부들 중심으로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일이나 수요일 혹은 금요일에나 모이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농번기를 제외하고는 매일 모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했습니다.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찬송부르고 기도하고 성경읽고 찬송부르고 기도하고 성경읽고."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물었습니다. 지겹거나 힘들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아니라고, 너무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많이 깨닫고 배우고 발전한다고 말입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신통치 않은데 아마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S 선배님,

우리는 한 주간에 몇시간 쯤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1995년 9월 1일 신학교 채플에서 설교했던 설교문을 발견했는데,

거기엔 우리 나라 기독교인들의 평균 성경읽는 시간과 설교를 듣는 시간이 계산돼 있었습니다.

1년에 불과 주일 설교는 개근을 할 경우, 17시간 20분이었고,

새벽기도회까지 충실하게 출석했을 경우 다 합쳐도 전체가 17일 5시간 40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교회는 날마다 모여서 말씀을 읽고 듣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중국의 시골 교회 역시 날마다 말씀을 읽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래선지는 몰라도 성경을 가르치러 간 교수인 저 보다도

성경의 내용에 관한한 그들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로 이동을 하고 만난 어느 교인이 기억납니다.

그 분은 예수믿자 곧 바로 성경공부반에 들어왔고,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공부했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분은 다른 교우들과는 전혀 다르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신앙이 자라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신앙이 성장하는 사람은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20년 30년 교회 문턱만 밟고 다니는 교인들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가 씁쓸해 집니다.

이 모든 잘못은 제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면죄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때늦은 일이지만,

저의 묵상자료만이라도 제대로 읽지 않고 꼼수를 쓰는 분을 보면 가차없이 퇴출시키고 있습니다.

5-10분도 성경읽기에 시간을 낼 수 없다면, 목사 내려놓고 장로 내려놓으라고 말입니다.

 

S 선배님,

오늘은 선배님이 그립습니다.

성경읽기를 무던히도 강조하셨으니까요.

개나리와 진달래 그리고 벚꽃까지 함께 자태를 뽑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번이나 이런 꽃의 향연을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제 막내 딸의 마흔 두번째 생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많이 살았습니다.

그동안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감사할 뿐 입니다.

 

2018년 4월 2일 도봉산 둘레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