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없는 편지

B 목사님께.

박성완 2018. 4. 9. 01:23

오랫만에 소식을 전합니다.

사실 목사님께 며칠째 전화를 드렸지만 전화를 받지 않으십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목사님을 아산 시내에서 몇번 만났었지요.

그런데 처음엔 저를 알아보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차 안에서도 목사님을 뵀는데 정신없이 어디를 가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치매가 중증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안부가 궁금하고 더 심해지기 전에 모시고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목사님은 제가 아산으로 이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중개인을 따라 집 구경을 갔을 때, 목사님 내외분이 옆집에 산다시면서 나오셨지요.

그리곤 예비역 대령이신 군목이셨노라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은퇴 후에는 함께 늙어가며 많은 지도를 받을 수 있겠다 싶어서 결정을 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목사님은 4년 후 시내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해 나가셨습니다.

이사해 나가신 뒤로도 제게 전화를 자주 해 주시며 아산에 오는 날을 기다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맛집도 찾아다니고, 동네 어르신들 점심 접대하는 일에서도 자주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B 목사님 !

오늘 제가 글을 쓰는 것은 저 역시 목사님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오늘 4월 8일, 저는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제가 매달 두번 출석하는 교회가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예배 전 30분 경에 교회에 도착해서 텅빈 교회당에서 주보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고란에 "오늘 설교해 주신 박성완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라는 문구를 봤습니다.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예배 순서란을 보는데 설교자와 설교제목이 저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사실 어제 이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는데

오늘 설교 요지를 한 장 프린트해서 가져와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조금 이상한 내용이었지만 제가 설교한다는 얘기는 전혀 없었거든요.

다만 아이를 데리고 오는 교우가 설교에 집중할 수 없어서 가끔 주일 설교요지를 나눠준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의 설교자라는 생각은 전혀 들게 하지 않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주일 예배 전에 약 20-30분간 성경공부를 교육관에서 하는데

목사님과 상의를 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문제는 제가 설교자라면 성찬예배도 있어서 목사가운도 입어야 하는데, 저는 정장차림이었습니다.

예배시간 5분 전에야 목사님이 나오셨고, 우리는 어떻게할까를 고민했습니다.

결국 예배에 참석한 교우들을 위해서 제가 설교하기로 한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진한 땀을 쏟은 적이 없었습니다.

작년 11월에 제가 작성했던 2018년 설교 계획표에 있는대로 성구와 설교제목을 주보에 옮기신 것이고,

다행히도 목사님은 제 설교요지를 프린트해서 가지고 계셨습니다.

설교요지는 오늘 새벽에 제가 묵상자료로 보냈던 내용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설교계획표대로 설교를 준비한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다행히 설교는 엉망징창이 되지 않았지만, 조금 더 길어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설교의 초점만은 더욱 명료해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5개월 전에 했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한 것,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절대로 기억하지 못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기를써도 앞으로는 기억하는 시간들이 사라지는 건 앞당겨지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낭패스러운 일들이 자주 닥쳐올 것도 같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담임 목사님의 말을 되살려 보았습니다.

1년에 4번은 설교할 기회를 달라고 했답니다. 제가.

1월 4월 7월 10월에요. 그런데 분명히 저의 설교 계획표에도 그렇게 기록돼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

우리들 삶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이 잊혀진 대상이 된다고 하지요.

기억에서 사라질 때, 얼마나 초라하고 슬픈 일입니까?

나를 기억해 주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슬프겠지요.

그래서 너무 오래 사는 것이 좋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를 쓰고 기억장치를 보존하고 싶지만 발목과 무릎이 시려지고 무뎌지듯,

우리의 뇌도 매일매일 축소돼 가고 있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용기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오늘 낭패를 겪으면서 더욱 새롭게 기억력의 은총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목사님께서 겪고 계시는 힘든 시간이 빨리 끝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일 밖에는 달리 없겠지요.

그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통과의례일 테니까요.

오늘도 목사님댁에는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주 안에서 영육간에 평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평화 !

 

박성완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