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 막 9:2-13.

박성완 2019. 5. 6. 04:12

묵상자료 3963(2012. 3. 23. 금요일).

시편 136:9-12.

찬송 37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자 친구를 부모님이 직접 본 것은 졸업식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졸업식 다음 날, 어머니는 자신을 불러 앉히고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처럼 여자 친구와 헤어지라고, 그 애와는 절대 결혼시킬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실은 자신이 가장 어렵다는 시험에 합격한 다음 날부터 예상한 일이었습니다. 부모님은 그 날로 세상을 다 얻으신 듯 하셨고, 그 모습은 가난한 집안의 여자 친구와의 결혼은 절대 허락하실 수 없다는 신호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부모님을 설득하다 지쳐,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게 6년 전 일입니다. 여자 친구는 헤어진 지 1년 만에 결혼을 했고, 곧 딸을 낳았다는 얘기도 들려 왔습니다. 그런 소식들 다 잊고 이제 곧 자신도 결혼을 합니다. 부모님은 이제 와서야 더 큰 후회의 표정으로 그 때 네 결혼을 말리지 않는 건데, 막막한 표정을 짓곤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번엔 말리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제는 고맙고 존경스럽습니다. 이제 곧 결혼을 하게 될 여자가 바로 졸업식날 보시고 말렸던, 그래서 헤어졌던 그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헤어지고 나서 자신도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았던 소식을 들으며, 그녀와의 인연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혼자서 딸을 키운다는 소식을 들은 얼마 뒤, 그는 결국 그녀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딸과 아내를 함께 얻게 될 결혼식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러니 부모님은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그냥 허락하는 건데, 후회를 하시는 겁니다. 주위에선 자신을 대단한 순애보의 남자인 듯, 이런 시대에 마치 물질보다 풍요보다 사랑을 택한 대단히 순수한 남자인 듯 말합니다. 착각들입니다. 자신이야말로 자기 위주로 따질 것 다 따져서 그녀를 다시 택한 것이었습니다. 풍요로운 물질의 무게와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잘 해 줄 여자를, 수없이 저울에 올려보고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의 삶에 차이가 좀 있을 거라는 확신은 듭니다. 저울이 물질에 기운 사람들이라면, 물질 때문에 행복해야 할 텐데 갈수록 그렇지 않다는 선배들인 많은 반면, 자신의 저울은 남들과는 좀 다른 방향으로 기울었지만, 갈수록 더 행복해 질 거라는 확신이 드는 겁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224일 방송>a.

 

2. 변화 산에서 초막 셋을 짓고 싶어 했던 제자들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그 중심에 서 계신 주님과 함께 살고 싶어 했던 제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학용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쾌적 영역>이라는 뇌의 한 구조가 있다고 합니다.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편안하게 지내려는 뇌의 한 영역이라고 합니다. 여행을 마친 후 역시 집이 최고라고 느끼는 것이나, 바깥생활에서 긴장하며 지내다가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 앞에서 뒹구는 것도, 집을 가장 편안한 쾌적 영역으로 여기는 때문이라고 합니다이 말은 사람들은 쾌적 영역에 둥지를 틀고 안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제자들 역시 변화 산에서 쾌적 영역을 찾은 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을 향해서 갑자기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다고 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7) 고 말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신비체험에 대해서 해석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살아온 내력이나 관심이나 경험들이 다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인정해 주는 편입니다. 그런데 세 사람이 동시에 같은 체험 곧 집단 체험을 했다고 하는 것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실 참여이거나, 집단 최면현상이거나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는 음성 말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계가 성경 말씀에 집중해서 관심을 가진 까닭이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인용하거나 사용하는 문제가 심각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맥에서 이해되지 않고, 단편적으로나 혹은 문자적 의미로 오용되는 어리석음 말입니다. 대화에서도 맥락적 경청이 필요하고, 글에서는 문맥적 이해가 아니라면, 언제나 곡해가 가능하다는 뜻이겠습니다. 제자들의 신비 체험은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맥락적 이해를 말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