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2012. 4. 1. 사순절 여섯째주일] 가시관을 쓰신 메시야. / 막 15:1-39.

박성완 2019. 5. 6. 04:24

묵상자료 3972.

시편 138:7-8.

찬송 13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인간은 십자가를 외친다. 민족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죽을 때까지 그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자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어깨에 메고 가기만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부활할지니. 오직 그 만이 행복하다.” 니콜스 카잔차키스가 했던 말인데요. 정말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이 십자가를 매고 살아간다고 생각은 해도, 우리가 누군가를 십자가에 못 박을 생각도 또 스스로 못 박히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지요. 하지만 때론 혹독한 역사는 평범한 누군가를 십자가에 못 박기도 합니다. 103년 전 오늘 아침에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그 함성의 주인공들을 떠올려봅니다. 비록 얼굴로 이름도 다 알지 못하지만, 스스로를 못 박은 선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고 겸허해지고 또 행복한 마음을 가져도 좋은 아침이겠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31일 방송>

 

2. 오늘은 고난 주일 혹은 종려 주일입니다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으로 고난의 절정을 향해서 느리게 걸어가게 됩니다. 세상을 구하러 오신 메시야가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와 메시야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건강한 기독교 구원관을 정립하게 될 것입니다. 가시관을 쓰신 메시야,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메시야가 가시관을 쓰신 모습은 낯선 일입니까?(1-32).

십자가는 가장 악독한 죄인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치욕적인 형벌로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가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시관을 쓰게 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낯선 얘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래 전에 그 같은 분위기를 잘 파악하고 언급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일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고 한 말입니다. 적어도 천지를 창조할 만한 능력을 가진 하나님이시라면 가시관이 아닌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등장해야 옳다고 말입니다. 사도가 말한 것처럼 십자가와 가시관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에게는 잘 어울릴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피조물을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신다는 주장은 이전에 전혀 들어보지 못한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가시관, 역시 낯선 얘기입니까?

 

가시관은 메시야가 써야 했습니다(12:24,53:4-6).

가시관은 주님에게 수치를 더해 주기 위해 준비된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잘 준비한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거두느니라.” 그러니까 가시관을 쓰신 메시야는 수치와 고통에 묻힌 채 사라지는 허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생명을 살려내는 생명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가시관을 쓰신 메시야를 보면서 절망과 수치를 느끼게 됩니다만, 사실은 그 반대편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가시관 너머에 서 계시면서 두 팔 벌려 우리를 안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뜨라고 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주님의 가시관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었고, 죄와 죽음을 물리치고 영생에 이르게 하는 능력의 씨앗이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 신앙은 가시관을 쓴 메시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고전2:2).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타 종교가 낙원을 향해 상승하는 방향성을 갖는다고 하면, 기독교는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게 초점을 두는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세상이 죄 가운데서 죽어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 죄를 대속하는 제물이 되시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분의 구원행동을 믿는 데에 신앙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타종교인들처럼 자신의 헌신적인 노력과 깨우침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을 대속 물로 기꺼이 바치신 그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믿는 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나님의 공로로 구원에 이른다는 신앙을 참된 신앙으로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