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는 저주가 가능할 수도. / 막 11:12-25.
묵상자료 3973호(2012. 4. 2. 월요일).
시편 139:1-3.
찬송 48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훗날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라 불리게 될, 니콜스 카잔차키스가 태어났을 때 그의 고향 크레타 섬은 아직 터키의 지배아래 있었습니다. 그리스는 무려 400년간 오스만 트루크의 지배를 받다가 1832년에 독립했지만, 크레타 섬은 여전히 터키의 식민지로 남은 상태였습니다. 카잔차키스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다른 섬에 피신시키고, 독립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때 아버지가 부탁했다고 하지요. 크레타 인으로써 명예를 지키고 독립에 기여하라고. 카잔차키스에게 전사로써의 임무가 부여된 순간이었습니다. 훗날 그는 [영원의 자서전]이라는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 영혼을 처음으로 뒤흔든 것은 공포나 고통이 아니었고, 쾌감이나 장난도 아니었으며 자유에 대한 열망이었다. 우선 터키인들로부터 찾아야 하는 자유, 그것이 첫 단계였고, 그 다음에는 내면의 터키인인 교만과 악의와 사기로부터, 공포와 게으름으로부터 눈을 멀게 하는 헛된 사상으로부터, 그리고 가장 사랑과 흠모를 받는 대상들까지도 포함한 모든 우상들로부터 자유를 찾으려는 새로운 투쟁이 시작되었다.” 때문에 그는 1913년 그의 나이 서른 살에 크레타가 독립한 후에도, 신과 인간, 영혼과 육체, 선과 악, 신앙과 무신론, 삶과 죽음, 종교와 철학 이 모든 대척점을 깨부수려는 투쟁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운명을 거스르는 초인의 모습을 볼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에게는 거스르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었지요. 카잔차키스는 이 사건을 [그리스인 조르바]에 썼습니다.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무 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주었다. 열심히 데워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 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경이로운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나비는 어떻게 됐을까요?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니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 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인간은 서두르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 영원한 법칙을 내가 감히 어겼기 때문에 나는 나비를 죽였다. 그리고 내 손에는 시체만 남았다.” 카잔차키스는 이 사건을 통해서 서두르거나 인내하지 못하면, 남는 것은 시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자연의 법칙과 영원한 리듬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에게 자유라는 이름의 법칙이고 리듬이었습니다.
2. 오늘 본문은 무화과나무에게 저주하신 일화와(12-14절, 20-25절),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일화를(15-18절)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무화과나무 일화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전날 우리 주님은 예루살렘 시민들로부터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연호하는 가운데 입성하시고, 어느 집에서 유월절 만찬을 드신 후 베다니에서 주무셨습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베다니를 나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도중에 시장끼를 느끼셨고, 무화과나무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을까 찾으셨는데, 열매가 없자 그 나무를 저주하셨고, 오후에 되돌아 와서 보니 그 나무가 말라 죽어 있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있는데, 그 때는 무화과가 열매를 맺는 철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13절). 철도 아닌데도 열매가 없다고 그 나무를 저주한 것입니다. 충분히 억울한 생각이 들 경우라 하겠습니다. 주석가들은 시험 중이시던 주님이 돌로 떡 만들기를 거부하신 분이, 당신의 배고픔을 채워주지 못했다 해서 당신의 피조물을 저주하실 리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고, 아직 열매철이 아닌 점을 생각한다면 저주가 가당치 않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난처한 경우를 만날 때, 우리는 해석에 있어서 더욱 더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무화과는 유대인들에게 감람나무와 함께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 정화 사건에서처럼 하나님은 얼마든지 선민까지도 제 구실을 하지 못할 때, 저주하실 수 있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저주가 가능하다는 가장 좋은 예로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민이라는 의식만으로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변명만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변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