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설교를 다르게 듣는 까닭. / 마 28:1-15.
묵상자료 3982호(2012. 4. 11. 수요일).
시편 140:6-7.
찬송 24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번은 미국의 두 대학에서, 슬픈 감정이 사람들에게 어떤 호소력이나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조사했습니다. 두 그룹의 사람들에게 우선 슬픈 영화와 중립적인 성격의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었지요. 그런 다음 같은 물병을 얼마에 사겠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슬픈 영화를 본 그룹이 다큐멘터리를 본 쪽 보다 세배 이상 비싼 값에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슬픈 감정이 물건의 가치를 훨씬 비싸게 느끼도록 한다는 거지요. 이런 사실은 광고에서는 거꾸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팔고자 하는 상품에 슬픈 감정이나 분위기를 보태서, 사람들의 슬픈 감정을 자극하는 겁니다. 그러면 실제로 판매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물론 모든 상품에 늘 똑 같이 적용될 수 있는 효과는 아니겠지요.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하고 호감을 상승시키는 건 역시 밝고 즐거운 광고나 권위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무겁고 힘든 감정 같기만 한 이 슬픔이라는 것도, 사실 큰 쓸모와 힘이 있다는 걸 앞의 실험은 일깨워 주지요.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 라는 시 떠오릅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그렇게 시작되는 정호승 시인의 시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었다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날씨로든 마음에든 봄이 와야 하는데 오지 않고 오히려 겨울 같은 추위나 눈마저도 내릴 때에도, 그런 슬픔도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면서 기다리겠다고, 시인은 기쁨에게 오히려 슬픔의 위력을 말해줍니다. 사람에게 있는 감정 중에는 알고 보면 버릴 감정이 하나도 없는 거겠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3월 8일 방송>a.
2.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서의 부활 사건 보도입니다. 원마가복음서를 기본 자료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조금 더 길어졌습니다. 빈 무덤과 천사를 만났던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가는 도중에 주님을 만났다는 것과,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들이 무덤 문이 열려있고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자 대제사장에게 보고하였고, 거짓으로 은폐하려고 그 파수꾼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얘기가 첨가돼 있는 점입니다. 신학교에서만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성경을 읽는 평신도들도 가끔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어찌하여 똑 같은 본문을 취급하는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질문이 될 법도 하고 질문이 될 수조차 없다고도 할 만하지 않습니까? 제 설교를 같은 자리에서 들은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다르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설교하는 제가 듣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어떤 특별한 이해력을 넣어준 것이 아닌 다음에야, 그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듣는 사람 마음대로 라고 말입니다. 듣는 사람의 기분이나, 전 이해, 상황 등 등 수도 없는 차이점들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 역시 전해들은 구전이나, 단편적인 기록물들을 대할 때, 그들 나름의 상황과 이해 등을 기초로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모두는 그 나름대로 진실이고 진리를 전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고 여러분 중의 설교자나 가르치는 이들은, 누군가가 호평을 한다고 너무 들뜨지도, 누군가가 악평을 한다고 의기소침해서도 말아야 할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의 진심을 담아서 말해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3. 오늘 투표장에 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진실 된 선택은 나라를 건강하게 만드는 초석이 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