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 / 마 28:16-20.
묵상자료 3983호(2012. 4. 12. 목요일).
시편 140:9-13.
찬송 44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동양 의학자들에 따르면, 슬픔은 화를 다스리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를 가라앉히기 힘들 때에는, 슬픈 생각을 하거나 슬픈 영화를 보라고도 하지요, 그러면 화가 쉽게 잘 가라앉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감정이든, 너무 오래 길게 지속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심지어 기쁨이나 환희 설렘 같은 그런 좋은 감정들도 그렇다고 합니다. 하물며 슬픔이야, 아무리 힘이 되고 도움이 된다 한들, 너무 길게 오래 지속되는 건 좋지 않겠지요. 특히 슬픔은 폐와 관련이 깊어서, 너무 길게 오래 슬퍼하면 몸에 진이 빠지고 기가 다 달아나기 쉽다고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1890년에 그린 그림 <슬퍼하는 노인> 속 그 노인은,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습니다. 의자는 고흐 그림에 주로 등장하는 그 팔걸이 없는 투박한 의자고, 노인이 신은 구두는 고흐의 다른 그림에 등장하는 낡고 헤진 구두를 연상시킵니다. 입고 있는 옷도 위아래 똑 같은 푸른색의, 발목 부분이 더욱 짧게 보여서 더욱 슬프고 또 안쓰럽습니다.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생 레니 정신병원에서 발작 증세에 시달리던 고흐 자신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슬퍼하는 노인의 모습이 아니라, 오래 된 슬픔과 고통의 모습 그 자체인 것만 같습니다. 20대 30대에도 나이에 상관없이, 어떤 일에 너무 오래 슬퍼하고 있으면, 내면이 고흐의 슬퍼하는 노인같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슬픔도 힘이 된다지만, 단 힘이 될 때까지만 슬퍼해야 하리라. 3월은 너무 오래된 그 낡은 슬픔을 정리하기에도 좋은 달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3월 8일 방송>b.
2. 부활이 신앙의 영역이라는 말씀을 드린바가 있는데, 적어도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사실과 신앙이라는 두 경계가 모호했을 테니까 많이 헛갈렸을 것 같습니다. 오직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의심의 그림자가 그 마음에 드리웠다고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부활은 천지 창조와 같이 그냥 믿는 길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설사 위험한 모험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저는 수학자요 철학자인 파스칼의 도박(Pascal's Gambling)이라는 공식을 하나 배워두었던 것을 두고두고 써먹곤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플러스 무한대)의 가치가 있다는 내용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을 갖고 사는 삶이, 아무런 믿음 없이 사는 삶보다는 훨씬 더 풍부하다는 뜻도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백미는 18-20절로,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우리들 믿는 자들에게 명한 명령입니다. 저는 이 세 구절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곤히 잠을 자고 있는 아내 얼굴을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41년을 함께 살아오면서 많이 늙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왠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가득 번져왔습니다. 자식 셋을 아내가 혼자 키우다시피 했다고 공치사한다고 늘 불만이었는데, 틀림없는 사실이고, 평생 생활비 한번 넉넉하게 쥐어 준 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제대로 된 반지 하나 사 준 일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아내가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없음을 알 것 같습니다. 헛된 꿈이 될 테니 말입니다. 그냥 곁에만 있어주는 것이라면 몰라도, 필요할 때 힘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 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못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하며 도움과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시겠다고 말입니다.
3. 투표하신 분이 뽑히셨습니까? 저는 세태를 잘 읽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주 빗나가거든요.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