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그래도 베드로가 남다른 점. / 눅 24:1-12.

박성완 2019. 5. 6. 04:37

묵상자료 3984(2012. 4. 13. 금요일).

시편 141:1-3.

찬송 3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도종환 시인이 엮은 [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시인이 삼월 첫째 주의 새 학기를 맞으며 라는 제목으로 배달한 시는 이시영의 <성장>이었습니다. “바다가 가까워지자 어린 강물은 엄마 손을 꼭 끌어 않은 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거대한 엄마 손을 아득히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 잘 가거라. 내 아들아, 이제부터는 크고 다른 삶을 살아야 된단다. 엄마 강물은 새벽 강의 시린 몸을 한번 뒤채고는 우리처럼 곧 순한 머리를 돌려 반짝이는 은어들의 길을 따라 산골로 조용히 돌아왔습니다.” 강물이 바다와 합쳐지는 길목은 유난히 물살이 소용돌이치고 빨라지지요. 어린 강물이 거대한 파도의 뱃속으로 뛰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 모습을 어린 강물이 엄마 강물의 손을 놓치고 마는 것으로 표현을 했네요. 하지만 엄마 강물의 진실은 더 깊은데 있었지요. 도종환 시인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어린 강물이 엄마 강물의 손을 놓친 게 아니라, 엄마 강물이 살며시 손을 놓았겠지요. 바다로 가야함으로. 크고 다른 삶을 살 때가 되었음으로, 떠나보낸 거겠지요. 잘 가거라. 내 아이들아, 엄마 강물은 속으로 이렇게 말하며 아팠겠지요. 시린 몸 한번 뒤채고는 은어들의 길을 따라 조용히 되돌아왔겠지요. 오늘은 새 학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학교생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바다로 나가는 어린 강물들이 저마다 반짝이는 물살이기를 바랍니다.” 라고요. 그래요. 어쩌면 최초의 성장은 엄마 품을 떠나면서 울면서 시작될 지도요. 아직은 어려서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서 울며불며 야단이지만, 엄마는 나처럼 살지 말라고, 너는 크고 다른 삶을 살라고, 억지로 품에서 떼어놓습니다. 그렇게 얼떨결에 떠밀리듯 나온 큰 세상, 바닷물은 강물과 다르게 왜 이렇게 짠지 깨닫는 순간, 우리는 또 한 번 크게 성장합니다. 니콜스 카잔차키스의 [눈물]이라는 책에는, 이런 감동적인 장면이 등장하지요. “무엇을 보고 계신가요? 영감님. 노인은 머리를 들고 슬픈 미소를 지었다. 흘러가고 사라지는 내 인생을 내 삶이 흘러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다오. 걱정 마세요  영감님, 당신의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알고 있으니. 바다를 향해서, 모든 사람의 삶은 바다를 향해서 흘러가고 있어요. 노인이 한 숨으로 그래요. 젊은이 그렇기 때문에 바닷물이 짜다오. 수많은 사람의 눈물이 모였기 때문에.”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35일 방송>

 

2. 어린 시절 목사님들이 베드로를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부를 때마다 조금 거부 반응이 일곤 했습니다. 목사 수업을 받고 있을 때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열두 제자들 중에서 세 사람이 뽑혀서 주님과 특별한 경험들을 했다는 성경 본문이 많음에도 불구하고베드로는 여전히 급한 성미에 앞 뒤 안 가리고 말부터 해 버리는 행태 등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마 교외에 있는 가장 크다는 지하교회(카타콤베) 길목에 위치한 쿠오바디스 교회에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스무 너덧 명이나 앉을까 한 작은 교회당터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환상을 본 후, 순교의 길을 터덕터덕 걸어갔다는 베드로의 마지막 행적을 들으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서가 전하는 부활 소식입니다.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여인들이 빈 무덤과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의 얘기를 제자들에게 전했을 때, 그들은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라고 했습니다. 다른 번역서들을 보면, “그 말이 정신없는 말로 들려”(새번역), “이 말이 허튼소리 같아서”(현대인의 성경), “여자들의 이야기가 부질없는 헛소리려니 하고”(공동번역) 생각한 나머지,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아도 그랬을 법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혼자서 무덤으로 달려가서 확인해 보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만은 달랐다고 말입니다. 그 여인들의 말을 정신없는 말도, 허튼 소리로도, 부질없는 헛소리로도 듣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싹을 자르지 않았더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믿음의 싹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은 살아남도록 부르셨을 것입니다.

 

3. 오늘 저희교단 원로 목사님들을 저희 집에 모시려고 합니다. 작년부터 불러달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늦고 말았습니다. 일평생 목회일념으로 수고하신 그 분들의 깊은 주름을 잠시라도 펴드리는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