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주님의 제자입니까? / 마 4:18-25.
묵상자료 3999호(2012. 4. 28. 토요일).
시편 145:8-11.
찬송 51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봄을 알리는 꽃은 동백입니다. 붉은 동백은 매화를 깨우고, 순백의 매화는 노란 산수유를 부르고, 산수유는 벚꽃을 재촉하고, 또 벚꽃이 피고나면 붉은 진달래와 철쭉으로 온 봄이 물듭니다. 그렇게 봄이 다 와 버리기 전에, 삼월이 다가기 전에, 친구에게 문득 전화를 걸어서, 이런 말 꼭 해 보고 싶어요. “친구야, 우리 매화보러가자.” 옛 사람들이 얼마나 매화를 귀하게 여겼는지,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요, 솔직히 아직 몸으로 눈으로 공감하지는 못했습니다. 내가 보는 눈이 없어선가? 낙담을 하다가, 김용준의 [근원 수필]에서 이런 글을 봤어요. “매화의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느뇨? 세인이 말하기를 매화는 늙어야 한다, 합니다. 그 늙은 등거리 용의 몸뚱이처럼 뒤틀려 올라간 곳에, 성긴 가지가 군데군데 뻗고, 그 위에 띄엄띄엄 몇 개의 꽃이 피는데, 품위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랬습니다. 늙은 매화나무를 아직 만나지 못했네요. 매화의 고장으로 유명한 산청에는요, 짧게는 200, 300년 오래는 700년 된 매화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를 심은 사람들은 출세를 보장하는 벼슬도 뿌리치고 내려와서,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선비들이었지요. 그들이 매화나무를 심었던 이유를, 춘설을 머리에 얹고 피어나는 기개를 가진 꽃이기 때문에, 이렇게 고지식하게 추측해 볼 수도 있겠지만요, 매화 향기를 정말 맡아본 사람은 달리 해석합니다. 매향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마음 고요할 때 비로소 그 향기를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매화나무를 심는다는 건, 마음의 고요함을 추구했다는 뜻 아니었을까요? 근원 선생도 벗에게 청했습니다. “모 선생 댁에 매화가 피었다니, 우리 구경이나 갈까?” 하지만 돌아온 답은 꽤나 냉소적이었다고 하지요. “참, 자네도 꽤나 한가로운 사람일세.” 그래서 먼 산만 바라봤다고 합니다. 매화 구경할 여유조차 없이 사는 불 꺼진 재 같은 마음을 한탄합니다. 그렇다면 모 선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선생의 방에 들어서니 냉기가 가득했고, 이불 한 채조차 없더랍니다. 그러다 그가 끔찍하게 사랑하는 매화에 웬 이불 한 채를 돌돌 감아 붙인 걸 발견했다고 하지요. 아니 도대체 매화에다 저게 웬일이요? 하고 물었더니, 모 선생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답하더래요. “엊그제 어느 친구가 이불 한 채를 보냈습니다. 덕분에 어제 같은 추위에도 매화를 따뜻하게 해 줄 수가 있었소.” 정작 자신은 추워서 30초가 멀다하고 두 손을 호호 불면서 말이지요. 먹고 사는 일 외에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건, 과연 먹고사는 일로부터 한가한 사람만 가능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믿는 친구와 함께 늙은 매화를 보고 싶습니다. 3월이 다 가기 전에.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3월 7일 방송>
2. 제자 소명에 관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그물을 던지는 어부인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를 부르셨고, 또 다른 어부 형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현재 진행형이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한 쪽은 그물을, 다른 한쪽은 배와 부친을 버림) 주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제자들의 면면은 다양합니다. 대부분이 갈릴리 해변 출신이고, 어부와 세리 그리고 농부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내세울 것이 없는 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누구나 주님의 일꾼이 될 수 있다고 해서, 갈 곳이 없는 대학 수험생에게 “신학교나 가라”는 말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뽑으신 제자의 기준에 관해서 호기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루터는 일찍이 신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주문했습니다. 라틴어입니다. Oratio, Meditatio, Tentatio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 행동하는 사람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부단한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생각을 부지런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실천을 하려는 행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를 뽑으신 기준을 제 나름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보스러워야 한다, 그러나 우직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혹시 제게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바보 중의 바보이거든요. 그러나 한 번 먹은 마음은 쉽게 바꾸지 않으려 하니까요. 이제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볼 때입니다. 나는 주님의 제자인가? 하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