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나다(μαραν αθα). / 살후 2:1-17.
묵상자료 4012호(2012. 5. 11. 금요일).
시편 149:1-3.
찬송 28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야외 찻집에 앉아 있는데, 바람이 불면서 탁자에 놓아두었던 냅킨(napkin) 몇 장이 휙 날아가 버린 적이 있는 데요. 그런데 맨 밑에 있던 한 장은 탁자위에 잘 놓여 있었습니다. 탁자에 남아있는 물기를 먹고 그렇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지요. 엷은 물기가 그 냅킨을 꼭 붙들어 두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이 창로의 소설 [영원한 이방인]에 보면, 피부색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그래서 자주 자신을 낯설어하는 이방인 아내를 내 삶의 밸러스트(ballast)라고 표현을 합니다. 대충 살아가지 않도록,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했지요. 밸러스트란 밸런스(balance) 균형을 잡아 주기 위해서, 짐이 적을 때 바닥에 싣는 돌이나 모래 같은 짐을 뜻합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바닥짐> 이라고 하지요. 얼핏 배는 가벼울수록 더 쉽게 뜨고 더 멀리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데 오히려 배는 짐이 너무 가벼울 때, 그 균형을 잃어버리기 쉽다고 합니다. 그래서 짐을 모두 부린 빈 배나, 배 크기에 비해서 너무 적게 실은 배는 밸러스트, 바닥짐을 실어서 어느 정도의 무게를 유지해 주어야 하지요. 잔바람 한 번에 훅 날아가 버린 냅킨들 대신에, 탁자의 물기에 조금 젖어서 끄떡없이 제자리를 지키던 그 냅킨을 보면서도, 문득 그 바닥짐이라는 존재가 떠올랐어요. 살면서 걱정 근심 하나 없는 사람은 설마 없겠지만, 있다고 해도 그렇게 부러워할 건 아니구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가벼웠다가는 단 한 번의 잔바람에도, 쉽게 날아가 버릴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얻곤 하지요. 지금 내 마음을 조금 묵직하게 하는 걱정들 근심들은, 어쩌면 내 삶의 밸러스트, 기나긴 항해를 위한 내 배의 바닥짐일지도 모르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0년 5월 13일 방송>
2. 제게 편지를 보내는 분들 중에는 말미에 “나마스테!” 라거나 “마라나다!” 라고 쓰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주님의 평화!” 라고 하듯 말입니다. 매우 짧은 말이지만, 마지막 말로써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금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마스테는 “나의 하나님이 당신에게도 함께 하기를” 이라고 합니다. 마라나다는 말은 고전 16:22와 계 22:20에 나오는 아람어로, “주께서 임하신다.” 또는 “주여, 오시옵소서 ”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즐겨 사용하는 이들은 무슨 생각에서 이런 말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앞에서 이런 저런 말들을 많이 했지만,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얼마일지 모르지만, 당신이 꼭 기억해 둘 말이 있어요. 그것은 “주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곧 오실 것입니다.” 라는 간절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한다고 말입니다. 그 주님은 무서운 심판주로, 또는 사랑을 약속한 신랑으로 찾아오신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전히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온갖 헛소문들과 유혹의 소리들이 잠잠해지지 않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다시금 권고를 해야 했던 것 같습니다. 자칭 그리스도라는 사람들이 한국에도 나타난 지 오래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핑계로 돈을 갈취하는 사이비들도 즐비하게 깔려 있습니다. 사도는 이런 형국에 처한 형제자매들을 향해서,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선행(先行)될 일들을 소개합니다. 배도자들이 나올 것이고, 멸망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멸망의 아들”이란 적그리스도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최근 출현하고 있는 안티 크리스천들은 적그리스도라기보다는 엉터리 크리스천들을 혼내주려고 나타난 사람들 정도로 이해하면 어떨까요?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적할만한 위인들은 아닌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답지 않게 가르치고 또 그런 가르침에 아멘 하는 속 빠진, 무늬만 있거나 껍데기뿐인 기독자를 경고하는 도구로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