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일하며 배우기. / 마 10:5-15.

박성완 2019. 5. 8. 01:19

묵상자료 4031(2012. 5. 30. 수요일).

시편 5:8-11.

찬송 35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작가 에니 푸르의 [씨핑 뉴스] 또는 항해 뉴스라고 번역되는 작품 속에는, 뱃사람들이 사용했던 여러 가지 매듭들이 소개돼 있습니다. 그 중에는 사랑의 매듭이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뱃사람들은 양쪽으로 하트 모양이 되는 사랑의 매듭을 엮어서 여자에게 보냈다고 해요. 그래서 하트 모양이 그대로 느슨하게 돌아오면, 그냥 이대로가 좋겠다는 뜻이고, 단단하게 당겨져서 돌아오면 사랑이 받아들여졌다는 표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매듭이 뒤집혀 돌아오면, 당장 배를 타고 떠나버리라는 무언의 거부 표시였다고 해요. 이 메일이 없고 편지가 귀한 시절에도 이렇게 사랑을 전하는 방법들이 있었던 거지요. 펜도 종이도 구하기 힘든 조건에서, 뱃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물건을 이용해, 의사표현 하는 방법을 찾았던 것입니다. 씨핑 뉴스의 주인공 콰일은 뉴욕에서 실패하고, 거친 섬 뉴펀들랜드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웨이비라는 여자를 만나지요. 에니 푸르의 설명에 의하면, 광활한 와이오밍에서는 딸이 태어나면 주로 스카이라는 이름을, 또 어촌인 뉴펀들랜드는 순한 물결이라는 뜻의 웨이비라는 이름을 많이 붙인다고 합니다. 또 작가는 뉴펀들랜드 뱃사람들은 이 세상의 여자들은 모두 네 가지 유형으로 존재한다는 것으로 믿는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 네 가지 유형은 초원의 아가씨, 악마의 여인, 용감한 여인, 그리고 키 크고 조용한 여인. 콰일은 웨이비를 키 크고 조용한 여인으로 분류하고, 혼자 마음에 두지요. 그러면서도 머뭇거리기만 합니다. 자신이 사랑을 받을 만한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한 거지요. 하지만 무의식중에도 자신만의 하트 매듭 같은 사랑의 신호들을 보냅니다. “콰일은 초록색 비옷을 입고 걸어가는 꼿꼿하고 우아한 여인에게 흙탕물을 튀기지 않으려고 속도를 늦추었다.” 바로 이런 매듭들이지요. 그 사람 곁에 곧 바로 차를 세우고, 태어다 주겠다고 말을 거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속도를 줄여서 그 곁을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데는, 그리 큰 용기가 필요치 않겠지요. 내 마음이 시키는 그 만큼의 마음을 쏟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웨이비는 속도를 줄여 흙탕물을 튀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그 남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서로 반대편 기슭에서 헤엄치다가, 결국 연못 한 가운데에서 만나는 두 마리 오리처럼, 둘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런 행복한 결말에 이르게 됩니다. 때때로 이런 잔잔한 마음이 거창한 용기보다 더 강함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KBS FM 1, FM가정음악, 2008327일 방송>

 

2. 제자 파송의 본문을 읽었습니다. 갓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는 이들은 <교회 실습>이라는 과목을 이수하려고 교회에 배정이 됩니다. 일반 대학을 졸업한 이들도 있고, 신학대학에서 4년 동안 공부한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갑자기 전도사 호칭을 받으며 교회생활을 익히게 됩니다. 한번은 교회 실습을 하는 나이 지긋한 학생이 제게 물어왔습니다. 신학대학원에서 제일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설교학인 것 같다고 말입니다. 신학 입문도 필요하고, 구약 신약 개론을 막 시작하는 분의 말입니다. 교회에서 맡은 중고등부의 설교가 부담이 된 모양입니다. 처음엔 잘 할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님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제자들의 심정이 그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몇 가지 지침을 주십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과 가야 할 곳을 지정하셨고,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말하라고 하십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돈 주머니를 차지 말라고 하십니다. 일하면 품삯을 받듯이 현지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라고 하십니다. 환영하는 이들에게 평안을 빌고, 박대하는 곳에는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나오라고 하십니다.

   일하며 배우라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교육은 이론 따로 실습 따로가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깨달음과 실천은 별개가 아닐지 모릅니다. 때로는 깨달아서 실천하기도 하고, 실천하다가 보니까 깨달아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실습의 가치를 오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배움이고 깨달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기 싫은 일처럼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 따로 행동 따로입니다그래서 실습을 지도하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습니다. 말만 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바보처럼 따르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일하며 배우는 첫 단계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