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지금 여기에서 천국을 살아가는 길. / 마 19:22-30.

박성완 2019. 5. 9. 00:42

묵상자료 4072(2012. 7. 10. 화요일).

시편 18:12-15.

찬송 22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윌리엄 데이비스는 당장의 끼니와 잠잘 곳이 늘 분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방랑과 정착생활 모두를 겪으면서 내린 결론은, “이 인생이 무엇이랴? 걱정이 너무 많아 걸음 멈춰 서서 물끄러미 바라볼 시간조차 없다면이었던 겁니다. 흔히 걱정은 흔들의자와 같다고도 합니다. 움직이기는 하지만 우리를 어디로도 데려가지 않기 때문이지요. 마음을 나무 꼭대기에 올려놓고, 제자리에서 잔뜩 흔들어 대기만 하는 것이 걱정인 겁니다그런가하면 걱정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인 워리(worry), 애초에 사냥개가 사냥감을 잡아서 마구 물어뜯는 사냥 용어에서 비롯됐다고 하네요. 그래서 처음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올랐을 때, 단어 워리(worry)는 사냥개가 사냥감을 마구 흔들어대다, 혹은 잔인하게 괴롭히거나 비난하다, 이렇게 해서 해석돼 있었습니다. 그러던 워리(worry) 걱정의 공격대상이 19세기 들어서면서 웬일인지 사냥감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 자신을 괴롭히는 감정과 마음 상태가 된 겁니다. 그런 사나운 사냥개 같은 걱정에 물리고 휘둘리지 않으려면, 혹은 거기서 그만 놓여나려면, 가던 걸음 멈춰선 채 양이나 소의 눈망울처럼 우두커니,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듯이 물끄러미, 초록의 나무들과 흰 구름과 빗줄기와 강물을 바라보는, 윌리엄 데이비스와 같은 시간을 가져야 하리라 생각해 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511일 방송>b.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쉽다면, 어찌하여서 사람들은 부자 되기를 그렇게 소원 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가난하게 해 달라고 더욱 더 열심히 기도해야 옳은데 말입니다. 이렇듯 너무도 명백한 사실을 놓고서도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면,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싶습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저 같은 목사들의 잘못입니다. 실제로 우리 기독교 역사에 보면 이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12세기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많은 상속 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스스로 거지가 된 성자입니다. 그렇게 멀리 가지 않더라도 제가 어린 시절만 해도 목사는 의례 배고프고 찌든 삶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목사지망생들은 줄을 지어 몰려들었습니다. 요즘과는 격세지감을 느끼는 대목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어제의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살펴야 할 것입니다. 빗나간 목표가 빚어낸 슬픈 결과라고 말입니다. 언제부턴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희망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주저 없이 대학교수요, 장군이요, 변호사요.” 하는 식으로 대답하게 되었습니다. 희망이 될 수 없는 것을 희망이라고 말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런 것들이 희망일 수가 있습니까? 가령 제가 그런 질문을 했다면, 기대하는 대답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라든지, “행복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라는 대답입니다. 지금 주님이 예를 든 낙타 같은 부자 얘기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가졌던 희망사항이었던 게 분명합니다. 주님이 말씀하고 있는 부자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전혀 해 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삶이 무엇인가를 전혀 고민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을 쳐다보면서도 축재에만 열을 올릴 수 있었을까요? 병들어 죽어가는 이웃을 수없이 만나면서도 여전히 같이 아파해 주지 않을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천국에 가당키나 하겠느냐고 주님은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사람답게 사는 일이며,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어야 할 까닭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