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우리는 세리나 창녀보다 더 나은가? / 마 21:23-32.

박성완 2019. 5. 10. 00:03

묵상자료 4079(2012. 7. 17. 화요일).

시편 18:46-50.

찬송 44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박노수의 느닷없는 코 수염은 그의 아버지 박 교수가 주위 시선에 아랑곳없이 한결같이 매고 다녔던 나비넥타이를 연상시킵니다.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무엇, 그래서 조롱거리가 되는 약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그 약점을 포기하거나 취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더욱 도드라지게 들어나도록 언제나 줄기차게 내 보이지요. 그 이유에 대해 박노수는 나중에 주인공에게 물어봅니다. “우리 아버지의 나비넥타이 수수께끼를 풀었느냐?” . 그리고는 스스로 대답합니다. “우리 아버지 나비넥타이 말이다. 그거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더라. 나도 코 수염 하나 척 앞세우고 다니니까, 다른 걸로는 시비하는 자가 없더라.” 가 그 대답이지요. 자신의 단점을 아예 정면으로 들어내 놓는 게, 그 단점으로 인한 상처나 모욕을 견디거나 극복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뜻밖의 성취를 거두는데도 훨씬 더 낫다는 의미이겠지요. 중학교시절에 영어 선생님이 말을 더듬던 박노수에게 웅변 무대에 설 것을 권하면서 해 준 이야기에도, 이미 비슷한 맥락의 답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성취한다는 것은, 실수해서 체면이 깎일 가능성과 맞서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이나 무시를 당하는 점들을, 오히려 가장 잘 보이는 목 밑에다 타이처럼 다 들어나게 걸어두고, 그 단점이나 실수나 실패들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 그게 가장 큰 성공법이라는 걸, 나비넥타이를 맨 박 교수가 아니, 소설 [나비넥타이]를 쓴 소설가 이윤기씨가 가르쳐 주는 것이겠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514일 방송>b.

 

2.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눈에 가시처럼 고통을 주는 존재였을지 모릅니다. 내세울만한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탁월한 성경 해석력과 사람들을 끌어안는 포용력과 혜안(慧眼)으로 인해서 생긴 수많은 추종자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바리새인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서 흠집을 찾아내려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있었던 일화 역시, 그런 시각에서 엿볼 수 있는 한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은 작심(作心)을 하고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성전에서 가르치는)일을 하느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 당시에 성전이나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일은 랍비들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랍비들이란 랍비 학교를 나온 성경 교사나 설교자로써 유자격자들(5:32, 22:3)이 하였는데, 예수님은 랍비학교를 나온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궁지로 몰기에 적당한 질문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되묻기 방법으로 토론을 이끄셨습니다. “나도 질문을 하겠는데,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너희 질문에 답하겠다.” 고 하시며,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이 질문에 그들은 모르겠다고 대답했고, 예수님은 대답을 미루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온 말씀이 저 유명한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말로만 순종한 첫째 아들과 불순종의 말을 뉘우치고 순종한 둘째 아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리고 그 두 아들 중에서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른 아들이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 아들의 비유에서, 겉으로만 경건하고 권위를 내세우는 유대인들과, 죄인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세리와 창기들을 맞비교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더 가까운 사람은 세리와 창기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교될 수 없는 상대와 비교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도 멀리 있다는 판정에 유대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오늘 우리들을 향한 말씀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우리들 신앙은 세리와 창기들보다 나은 것이 있는가?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