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드려지는 삶. / 마 22:15-22.
묵상자료 4082호(2012. 7. 20. 금요일).
시편 19:11-14.
찬송 48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카프카의 한 우화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른 고양이와 아기 고양이가 장난을 치다가, 쫓기던 아기 고양이가 막다른 벽 앞에 선채로 어쩔 줄 몰라 하자, 어른 고양이가 가르쳐 주지요.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은 방향 전환이야.” 그런가하면 독일의 현대 작가인 로베르트 무질의 단편소설 <그리지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살다보면 계속 이대로 갈 것이냐, 아니면 방향을 바꿀 것이냐 망설여질 때처럼, 눈에 띄게 주춤 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 시기를 잘못 다루면 사람은 불행해 빠지기 쉽다.” 그 시기를 잘못 다룬다는 건, 방향을 바꿔야 하는데 바꾸지 않은 것도, 방향을 바꾸기는 했는데 잘못 바꾸는 것도, 이 두 가지가 모두 포함 되겠지요. 그러니 지금 방향을 바꾸어야 할지 그대로 두어야 할지, 바꾼다면 또 어느 쪽으로 어떻게 바꿔야 할지, 더 판단이 안 서고 더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방향을 튼다는 건, 그런 불안이나 위험까지를 다 포함하는 거겠지요. 토끼가 순간적으로 오직 방향을 트는 것만이 자기 목숨을 구하는 위하는 일이라고 믿고 방향을 틀 듯이, 모든 불안이나 위험까지를 다 자신의 결심과 책임 하에 두려는 각오로, 전적으로 몸과 마음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위치와 새로운 방향을 진지하게 가늠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6월 4일 방송>b.
2. 오랜 선생 이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질문을 하려고 손을 든 분을 대할 땐 긴장하게 됩니다. 물론 입버릇처럼 질문을 하면서도 말입니다. 모를 때는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싶을 때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질문보다 지적 욕구를 자극하고 지적 만족에 이르는 도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때론 이런 순수한 질문과는 달리, 함정에 빠트리고자 하는 무서운 질문도 있습니다. 그럴 땐 그 불순한 의도를 알아차린다 하더라도, 정중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바리새인과 헤롯당으로 뭉친 질문자들의 경우가 바로 그런 불순하고 위험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질문자들의 의도는 예수님을 정치적인 올무에 걸려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의 이런 덫에 걸려들기만 한다면 자신들이 수고하지 않아도, 로마 총독 빌라도가 간단한 방법으로 앓던 이를 빼 줄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를 물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열심당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로마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 식민통치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던, 이 질문은 어느 쪽으로든 위험한 덫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면, 열심당의 한 패거리로 빌라도에게 고발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금을 내라고 한다면,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자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 매국노처럼 공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올무를 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셋돈을 보이라고 하셨고, 그 셋돈의 형상이 뉘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는 명답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혜에 놀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과연 하나님의 것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묵상하게 합니다. 가이사의 형상과 대비되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마땅하다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