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난 예수님을 만나 보셨습니까? / 마 23:13-26.
묵상자료 4086호(2012. 7. 24. 화요일).
시편 21:1-2.
찬송 48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중국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육아와 도가에도 경지에 이르렀던 도연명이었지만, 자녀문제는 마음 같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의 고충을 토로한 시가 있는데요. <아들을 꾸짖다> 라는 제목입니다. “백발이 성성하고 살결도 전같이 윤택하지 못한데/ 비록 아들놈이 다섯이나 있다지만/ 모두 글공부를 싫어한다네/ 큰 놈 선은 벌써 열여섯이건만/ 둘도 없는 게으름뱅이이고/ 둘째선이란 놈은 곧 열다섯이 되지만/ 학문을 도무지 좋아하지 않는다/ 단은 동갑내기로 열 세 살인데/ 여섯과 일곱을 분간하지 못하고/ 막내 통은 아홉 살에 가까웠건만/ 아직도 배와 밥만을 찾는다/ 이것도 하늘이 내린 명이려니/ 차라리 술이나 마셔야지” 시를 읽으면서 슬며시 웃음이 나옵니다. 그래, 천하의 도연명도 자녀 문제로 힘들어했구나, 우리네 삶에 위안이 됩니다. 자기처럼 아들들이 학문을 좋아하기 바랐던 것이 욕심일지 모릅니다. “이것도 하늘이 내린 운명이려니, 차라리 술이나 마셔야지” 욕심을 비웠습니다. 부모로써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을 했습니다. 칼릴 지브란의 우화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몽유병에 걸린 어머니와 딸이 있는데, 둘이 잠든 채로 나왔다가 정원에서 마주칩니다. 어머니가 딸을 향해서 말하지요. “드디어 만났구나. 이 웬수야! 너 때문에 네 귀한 젊음이 다 소모되고 말았다. 너는 내 노동의 땀과 애통으로 너의 인생을 가꿨다고.” 딸도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당신은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을 방해해 왔어. 나한테 공부라는 것을 시켜서 자기 허영을 채우려했고, 날 한사코 이름 높은 집에 시집을 보내서 자기 소망을 이루려 하고 있어.” 그 때 새벽닭이 웁니다. 어머니와 딸은 잠에서 깨어났고,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습니다. “얘야, 감기 들려고 왜 잠옷 바람으로 나와 있느냐?” “어머니도 조심하세요. 바깥바람이 찹니다.” 이 우화가 담고 있는 건, 부모와 자녀가 서로에게 느끼는 무의식과 의식의 세계입니다. 특히나 몽유병이라는 설정을 통해서 들어난 무의식의 세계에서, 부모와 자녀가 얼마나 서로를 구속하고 짐이 되어 왔는지, 적나라하게 표현을 하고 있는데, 표현이 심하기는 해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청소년의 행복 지수가 OECD 23개 국가 중에서 최하위라고 하지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학교폭력에 높아지는 자살률의 원인으로, 부모의 지나친 소유욕과 또 과도한 기대에 따른 욕심을 들 수 있겠지요.
이걸 버리지 않고서는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기 힘듭니다. “너는 활이요, 자녀는 화살이니, 그 활로 너는 자녀를 퉁겨 보낸다.” 칼릴 지브란의 이 말대로 요,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많아져서 이 땅의 교육 현실을 바꾸길 기대해 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5월 7일 방송>
2. 오늘 분문에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평상심을 잃을 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막말 수준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화가 나셨다고, 분노를 참을 수 없으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도 별수 없구먼. 우리와 다를 바 없고 말이야.” 라고 말입니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행태를 보고서 그렇게 분노를 가질 것입니다. 우리 시대도 이런 분노를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명보다 물질을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생명을 값싸게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용서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과 배고픔에 대물림한 이들에게 있어서는 약간의 독재나 약간의 불법은 눈감아 주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신 우리 주님은 어느 쪽에 손을 드셨을까요? 우리 기독자들이 항상 정신 줄을 놓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할 대목입니다.
천국 문 앞에 서서 자신도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일이며(13절), 순진한 사람을 지옥 자식으로 만들기도 하며(14절), 마치 소경된 인도자처럼 목적이 실종된 수단들을 강조하는 어리석음을 보이며(15-24절), 회칠한 무덤같이 겉만 보이지만, 속은 썩을 대로 썩어 있는 마음이었다고 말입니다(25-26절). 어떻게 이 정도까지 되어버린 것입니까?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미안한 줄도 모르는 사람들, 상식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처방은 알아들을 때까지 욕설을 퍼붓는 것뿐인지 모르겠습니다. 욕을 좀 먹으면 정신이 차려질지 모르겠습니다. 하도 답답하고 서글퍼서 예수님께서도 이처럼 화난 목소리로 욕설을 퍼 붓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3. 오늘 저녁에는 <이런 교회를 소망한다> 출간기념 토론회에 참석하려고 합니다. 한국 개신교회의 현주소를 자리 같아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경청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