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기를. / 마 26:26-35.
묵상자료 4097호(2012. 8. 4. 토요일).
시편 22:29-31.
찬송 28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눈은 왜 두 개 일까요? 흔히들 그 이유를 원근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요. 실제로 한 쪽 눈에 안대를 하고 다녀보면, 원근감도 원근감이지만요. 코앞에 있는데도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가 많이 생긴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왼쪽에 안대를 하면 정면에서 조금만 왼쪽으로 비켜서도 전혀 부딪힐 위험이 커지지요. 순전히 시야를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사람의 눈을 평가한다면, 어류나 조류의 눈보다 기능이 훨씬 떨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눈은 측면이 아닌 정면에 붙어 있는 때문이지요. 게다가 눈과 눈 사이도 개나 고양이 호랑이나 사자 같은 포유류에 비해서 20도 이상 왼쪽이나 오른 쪽으로 벗어나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럴 땐 고개를 돌려서 볼 수밖에 없지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는 외눈박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디세우스 일행을 동굴에 가둬놓고 매일 끼니로 두 사람씩 잡아먹었던 괴물이야기인데요. 그의 이름은 폴리페모스, 바로 외눈박이 거인족 키클로프스의 하나였지요. 폴리페무스가 하루는 오디세우스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이름이 “아무도 아니” 라고 알려주었지요. 그리고 어느 날 폴리페무스에게 포도주를 권해서 취해 잠들게 하고서, 불타는 장작개비로 눈을 찔러버립니다. 폴리페모스가 비명을 지르자 다른 키클로프스가 달려와서 누가 이랬느냐고 묻습니다. 폴리페무스가 알려주지요. 아무도 아니라고, 그 말을 듣고 다른 키클로프스들은 돌아가 버렸고, 오딧세우스와 그의 일행은 무시무시한 거인 괴물들을 피해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오디세우스의 정체를 알게 된 폴리페무스가 회한에 차서 이런 말을 하지요. 내가 오디세우스의 손에 눈이 멀 것이라더니 예언대로 됐구나. 나는 굉장히 힘이 세고 장대한 사나이가 오나보다 했더니, 봐라 세 푼어치도 안 되는 약골이 와서 결국 술로 속여 내 눈을 빼가다니. 사람의 눈은 두 개지만요. 좁은 시야를 볼 수밖에 만들어졌습니다. 또 그마저 눈이 하나라면 시야는 더 좁아지겠지요. 키클로프스는 한 개의 눈으로 자기 힘만 믿었기에,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쉽게 당했고, 하나를 잃어버리면 모두 다 잃어버린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은 두 눈을 가지고 늘 한쪽 면이 아닌, 다른 면을 보도록 해야 되고, 당장 눈에 보이는 것 말고도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런 교훈을 주는 것 아닐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4월 17일 방송>
2. 오늘 본문에는 성찬 제정의 말씀과 베드로의 부인 예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루터교회에서는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신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읽거나 선포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고 믿습니다. 이 말씀이신 하나님은 세 가지 형태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기록된 말씀으로(성경), 선포된 말씀으로(설교), 보이는 말씀(성찬)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입니다. 일찍이 교부 어거스틴은 성찬을 이렇게 설명한바 있습니다. “성찬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은총의 보이는 표지라. / Sacrament is a visible sign of an invisible grace.”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제 설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셨을지라도, 성찬에서는 반드시 은혜를 확인할 수 있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세례를 기억하고,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베드로의 부인 예고는 읽을 때마다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서 서글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장 신실한 제자 베드로에게서 그런 약함을 지적하고 계신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모든 인간을 향한 말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베드로 자신은 절대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합니다만, 그 항변은 얼마나 초라하고 구차한지를 조금 후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서울 서초동 성당 지붕에는 커다란 장닭 한 마리가 외롭게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은 언제든 주님을 모른다고 부정하며 살고 있는 우리들 신앙인들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또 다른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일 테니까 말입니다. 어느 설교자가 들려준 말입니다만, 설교에서 그리스도가 빠져있다면 그것은 기독교 설교가 아니라, 격려의 말씀이거나 처세술의 교훈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입으로 "나는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는 고백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내 삶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들어나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3. 저의 기쁨은 여러분들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품고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거나 듣는 일입니다. 너무 행복하고 자랑스러워서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7월 말일로 8명의 묵상식구들을 내보내야 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