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묻기 : 나는 누구인가? / 요 1:19-28.
묵상자료 4114호(2012. 8. 21. 화요일).
시편 27:7-10.
찬송 9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겨우내 텅 비어 있던 회색 벽에 담쟁이덩굴이 가득합니다. 황량한 벽 대신에 싱그러운 신록을 볼 수 있어서 즐겁습니다. 담쟁이덩굴은 자고 일어나면 어느 순간 저렇게 퍼져 있어요. 제 아무리 높은 벽이라도 맹렬하게 타고 올라가지요. 그런데 이름이 담쟁이. 되뇔수록 참 신기한 이름입니다. 쟁이라고 하면, 욕심쟁이 겁쟁이 고집쟁이 떼쟁이처럼 명사 뒤에 붙는 접미사인데, 담 뒤에 붙어서 식물의 이름이 됐습니다. 담쟁이덩굴은 홀로 서지 못해요. 줄기가 너무 가늘어서 홀로 설 힘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담장이나 나무줄기에 붙어서 자라는데, 눈치 밥 얻어먹는 객식구처럼 얌전하게 구는 게 아니라, 그 왕성한 생명력으로 그곳을 제 세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10m 정도는 너끈히 뻗어 나갈 수 있고요. 덩굴을 뻗어내는 덩굴 손에는요, 둥근 흡착근 때문에 한번 담벼락에 붙으면 또 쉽게 떨어지지도 않지요. 오히려 담이 높을수록 담쟁이의 존재감은 더욱 뚜렷해집니다. 그렇게 담쟁이는 우리에게 벽을 넘는 방법을 알려주지요.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였습니다. 담을 무서워하기는커녕 담이 타고 올라가서 품에 안아 버리는 담쟁이. 담이 높을수록 더욱 높이 성장하는 담쟁이, 그런 담쟁이가 좋아졌습니다.
2. 요즘들어 자기 정체성이라는 말을 자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올림픽에서도 민족이니 조국이니 하는 말이 많이 사용되었고, 넓디넓은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듯 하는 작은 섬 몇 개를 두고, 우리나라 러시아 중국이 일본과 한판 싸움이라도 할 듯 야단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두고, 내 것 네 것하며 다투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푸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누가 언제부터 그 땅에서 살았느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역사책을 뒤적여서 찾아내야 할 과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전쟁으로 빼앗아 차지한 땅이라고 하더라도, 국제사회의 동의를 얻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번의 땅 문제로 인해서 아무래도 일본은 부끄러웠던 과거가 솟아나는 것 말고는 얻을 것이 없을 듯합니다. 본문에서는 혜성같이 등장한 요단강의 사나이 세례 요한에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도대체 네가 누구냐?”
어느 묵상식구가 며칠 간 <예수원>을 다녀오겠다고 소식을 전해 오셨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찾아보려는 뜻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모두 자기 정체성과 관련된 물음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세례 요한은 좋은 모범을 남겼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그는 참 행복한 사나이였습니다. 결코 헛된 삶을 살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기드온의 아들 요담이 세겜 사람들에게 했던 예언이 있는데, <나무들의 왕을 뽑는 비유>가 그것입니다. 감람나무도 무화과도 포도나무도, 자기 자신의 소중한 임무를 저버리고 왕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데, 가시나무는 주저 없이 왕이 되겠다는 얘기입니다(대하 9:7-21).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례 요한은 말합니다. “나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든지,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라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다시 질문해 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내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고민은 되지만 유익한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봅니다.
3. 소명에 대해서 회의를 갖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며 걱정하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만큼 자기가 걸어야 할 길을 찾기 힘들다는 뜻일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