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수단이 목적을 집어 삼킬 때. / 요 2:13-25.

박성완 2019. 5. 11. 03:36

묵상자료 4118(2012. 8. 25. 토요일).

시편 29:1-2.

찬송 46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새 한 마리가 심장 속으로 들어와서날갯짓을 하며 퍼덕이는 것처럼 가슴이 뜁니다. 새삼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날들을 예감하지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빛을 발하는 내 사랑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첫 데이트를 했던 날, 또 시험에서 합격이라는 소식을 들었던 순간, 처음 출근했던 날, 그리고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처음으로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말을 들었을 때. 이런 특별한 순간이 오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은 모두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고, 희망과 행복으로 가득 찬 다른 세계로 향한 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순간이 꼭 희망의 햇살과 행복의 종소리로만 찾아올까요? 죽어서 이 모든 고통을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혼자 산에 올라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낯선 노인이 다가와서 앉았지요. 노인은 깊고 따뜻한 눈길로 한참을 말없이 청년을 그저 바라봤습니다. 그리곤 이런 말을 들려주고 자리를 떠났어요. “너는 특별한 사람이 될 거야네가 원하는 걸 다 이룰 수 있을 거야그 때가 오면 사람들 많이 돕고 살아.” 혼자 남겨진 청년은 그 자리에서 오래오래 울었습니다. 청년은 이 특별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움켜쥐었고다시금 일어섰습니다. 기필코 살아 내겠다는 결심을 하자세상이 청년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지요.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때론 특별한 순간이란이처럼 알 수 없는 곳에서 통곡이나 울음과 함께 찾아오기도 하지요. 미카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서호라 박사는 현자입니다. 현자인 그는 모모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지요. “이 세상의 운행에는 이따금 특별한 순간이 있단다그 순간이 오면저 하늘 가장 먼 곳에 있는 별까지, 이세 상 모든 사물과 존재들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미쳐서, 이제껏 일어나지 않았고앞으로도 일어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애석하게도 인간들은 대개 그 순간을 이용할 줄 몰라. 그래서 운명의 시간은 아무도 깨닫지 못한 채지나가버릴 때가 많단다. 허나 그 시간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아주 위대한 일이 이 세상에 벌어지지.”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 6 4일 방송>

 

2. 목적과 수단의 도치(倒置), 즉 수단이 목적의 자리에 서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있습니까?

온갖 사이비와 혼란 그리고 끔찍한 전쟁 같은 것들이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목적 실종의 비극을 맞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생생한 역사가 오늘 본문에서 연출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성전 예배의 중심에는 제사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크게 세 가지의 제사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화목을 비는 화목제를 비롯해서 속죄제와 속건제 등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사하는 방법으로는 소제니 번제니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문제 그대로 제사나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인 인간들 사이의 교제이고 만남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오시고, 그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경배하는 이 제사나 예배야 말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예배의 진정성은 무색하게 되거나 마침내 사라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예배하는 방법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우린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저의 할머니를 추억하면 주일을 준비하는 절차가 복잡하고 험난하였습니다. 고운 흰 모시 치마저고리를 깨끗하게 빨아 풀하고 다듬질해서 다려 화태보에 걸어두십니다. 그리고 하루 전날에는 흰 고무신을 깨끗하게 씻어서 토방댓돌 위에 뒤집어 말리십니다. 그리고 주일 당일 이른 새벽에 옛날 제사지내던 그 자세로 찬물에 머리를 감으십니다. 그렇게 하시고 나서야 주일 예배를 드리러 교회로 향하십니다. 이런 예배를 준비하는 방법은 신성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의 하나 댓돌 위의 흰 고무신을 장난기 많은 손자들이 소꿉장난에 사용하다가 완전 검정 고무신으로 만들어 두었다면, 아마도 그걸 주일 예배당에 가려고 신으시려던 때 발견했다면, 화가 머리끝까지 솟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서 교회당에서 아예 고무신 가게를 열어두고 팔거나 빌려주는 일이 생겼고, 주일이면 예배가 무엇인지는 몰라도그 깨끗한 신발을 고르느라고 호객행위를 하거나 값을 흥정하는 다툼까지 벌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가지시겠습니까? 지금 우리 현대인들 역시 이런 목적을 집어 삼키는 수단을 정당화 하는 세상 흐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하는 것들은 과연 없는가? 정신을 차리고 살필 일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