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성경의 중심, 예수 그리스도. / 요 5:30-47.

박성완 2019. 5. 11. 03:50

묵상자료 4128(2012. 9. 4. 화요일).

시편 31:9-13.

찬송 10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힘들어선지 싫어선지 못해선지 모르겠지만, 혹은 이 세 가지 모두일 수 있지만요, 아무튼 기다리는 것은 힘듭니다. 싫고요, 잘 못합니다.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이야기는, 미국 스텐포드 대학의 미셸박사가, 4살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마시멜로 실험이지요. “, 여기 맛있는 마시멜로가 보이지? 이걸 지금 당장 먹어도 괜찮아. 하지만 내가 나갔다고 돌아 올 때까지 안 먹고 기다리고 있으면 한 봉지씩 더 줄 거란다.” 이렇게 말하고 미셸박사가 나가버리자 아이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지요. 바로 먹어버린 아이들과 꾹 참고 기다린 아이들. 그리고 이 아이들의 15년 후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다고 하지요. 바로 먹은 아이들은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굴복하고 좌절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성격이었고요. 꾹 참고 기다렸던 아이들은 적극적인 성격에 공부도 잘했다고요. 그런데 이런 아이들에게 잔혹한 실험을 했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미셸박사의 말에 따르면 정서지능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능력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이었다고 하는데, 이 말대로라면, 잘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중요한 능력이라는 뜻이 되네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까요, 기다림에 대해서는 따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강아지를 훈련시킬 때는 기다려 !” 많이 하던데, 사람한테 교육하는 모습은 잘 보지 못했습니다. 늘 무엇을 어떻게 해내느냐에 대한 것만 배웠지, 그저 참고 기다리는 것에 대해서는 잘 배우지 못했습니다. 잘 기다리지 못해서, 끝까지 기다리지 못해서망치는 일이 생각보다 참 많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실감하지요. 산다는 게 기다림의 연속임을. 더구나 그 기다림의 대부분은 언제까지 꼭 오겠노라는 약속도 기약도 없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기다림은 힘들고 지루하고 또 안타깝고 고통스럽습니다. 배가 고픈데 마시멜로를 눈앞에 두고 견뎌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요. 기다림을 이렇게 승화시킨 사람도 있었어요.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님 오신날 밤이어 든/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가 지은 유명한 시조이지요. \기다림의 시간과 기다림의 마음을 서리서리 잘라내서, 그 때가 오면 굽이굽이 펼치겠다니. 참 통쾌하고도 멋진 상상력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랑과 희망을 기다리는 방법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612일 방송>

 

2. 오늘 본문 역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진술하는 내용들입니다. 앞부분은 세례요한을 통한 자신을 진술하는 내용이고(30-38), 뒷부분은 성경의 중심이 예수님이심을 밝히시면서, 성경을 읽으면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은 기막힌 아이러니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저도 종종 제 얘기를 꺼내곤 합니다만, 자칫 잘못하면 바보짓이 될 수 있습니다. 못난 구석을 얘기하게 되면 푼수처럼 여길까 생각도 되고, 조금 잘했다 싶은 얘기는 듣는 이들이 마음을 닫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푼수 같은 얘기에는 의외로 좋아들 하십니다. 오늘 우리 주님의 말씀에서도 곱지 않은 눈으로 입을 삐쭉거리며 듣는 이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세례 요한의 칭송보다 더 귀하신 분이 나를 증거하신다고 할 때, 아마도 그들은 주먹을 불끈 쥐면서 치를 떨었을지 모릅니다. 저는 성경을 읽는 우리들이 성경에서 무엇을 찾는가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빌자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데, 성경은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는 말씀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그 속에 계신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다시 말하면 성경 자신이 말씀하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큰 헛수고는 없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제가 설교학의 실제라는 과목에서 학생들에게 설교 듣기 연습을 시키곤 했습니다. 방송 설교든 아니면 자신의 교회 목사님의 설교든, 그 설교에서 예수님이 중심에 계시는가 아니면 무시되고 있는가 찾아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제 경험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아예 빠져버린 설교가 훨씬 더 많았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의 증거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예수님은 나에게 얼마나 귀하고 중하신 분이신가?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