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기적은 믿음에 이르는 매우 작은 도구에 불과할 뿐입니다. / 히 19:11-13.

박성완 2019. 5. 13. 02:12

묵상자료 4165(2012. 10. 11. 목요일).

시편 38:9-11.

찬송 25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욕망을 참기 힘든 이유를, 그리스 신화에서는 이렇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최초의 남성신 우라노스가 아들 크로노스의 공격을 받아서 거세당했는데, 그 때 흘린 피가 땅에 떨어져서 에르니에스 세 자매가 태어났지요. 각자의 이름은 알레토 메가이네 티시포네. 이들은 욕망의 여신 질투의 여신 복수의 여신이 됐는데, 이름만 들으면 무시무시하지만요.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하면서도, 착한 여신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바다에 떨어진 피에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는데, 흔히들 사랑과 미의 여신이라고 하지만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성적 욕망을 상징하는 여신입니다. 훗날 제우스는 우라노스의 많은 자식들 중에서 딱 이 넷만 신으로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지배를 받지 않는다 라는 뜻인데요. 아마도 그녀들의 능력이 세상에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욕망이란 알레토의 선한 욕망이든, 아프로디테의 애욕이든, 애초부터 웬만해서는 다스려지기 힘들게 태어났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욕망에 있어서 완벽한 충족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롤랑 바르트는 욕망을 정의상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으로 한정시켰습니다. 아무리 원해도 얻을 수 없는 것. 설령 얻는다고 해도, 완벽하게 충족될 수는 없는 것. 바로 욕망의 정체입니다.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막 도착을 하면 저만큼 뒤로 물러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까닭은, 지금의 갈증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비록 욕망에 흔들리며 뒤뚱거릴지라도, 살아가게 만드는 동력이 됩니다. 욕망으로 들끓을 때보다, 아무런 욕망이 없어서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을 때가, 가장 무기력한 상황이니까요. 소통의 소설 [나 제왕의 생애]에 나오는 한 대목이 바로 그런 상황의 심각성을 알려 줍니다. “인간은 초조함과 공포, 거칠게 날뛰는 욕망으로 엮인 생명의 끈 한 가닥을 잡고 있다. 누구든 그 끈을 놓으면 그 즉시 어두운 지옥을 떨어진다. 나는 부왕이 그 끈을 놓음으로써 죽음에 이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욕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욕망의 끈에 내가 매달려서 끌려 다니는 것도, 지옥 같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에리니에스 세 자매처럼 욕망과 질투 복수는 붙어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지옥에서 살지 않으려면, 내 안에서 들끊는 이 욕망이, 남들도 가진 것을 나도 가지고 싶은 가짜 욕망인지. 아니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진짜 욕망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그 기준은 나에게 얼마나 만족을 줄 수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라, 그 결과가 나에게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 그리고 나의 삶 전체와 잘 어우러질 수 있을지로 판단해야 하겠지요.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의 욕망은 꿈이 되고우리는 마음과 혼이 담긴 길을 걸을 수 있을 겁니다. 욕망과 현실의 팽팽한 줄다리기에서 우리 모두 부디 승리할 수 있기를.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79일 방송>

 

2. 두란노 서원(書院)은 요즘 말하는 서점이나 책방을 말하는 게 아니라, 강연이나 모임을 갖기에 적당한 장소를 의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란노가 그 서원의 소유자의 이름이었는지, 아니면 강사의 이름이었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대체적으로 교양 있는 그리스인들이 이곳에 모여서 토론도 하고 강연도 듣고 하는 공공장소쯤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되면, 회당이든 이용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을 들어서 희한한 일을 많이 행하셨는데, 훗날 박태선도 이런 주장을 했었지요. 바울의 몸에 있는 손수건이나 천막을 기울 때 사용하는 앞치마 등을 병든 사람위에 얹기만 해도 병이 낫는 기적 말입니다. 그래서 이를 모방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는데, 그 중의 한 일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제사장 스게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는데, 이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미친 사람을 고치려다가 되레 봉변을 당했다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바울의 기적행위는 많은 사람들을 회개하게 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 믿어오던 어리석은 일들 그 중에서 마술을 믿던 책들을 모아다 불태우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기적 현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나름대로 이런 신비현상을 말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실제적으로 그런 신비적인 일들이 벌어진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기적행위는 믿음을 북돋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 인격적인 변화와 믿음에 이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동시에 은혜로운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3. 오늘과 내일은 평택에 있는 [제자들 교회]에서 교단 정기총회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물론 거기에서도 묵상은 계속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