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관계에 앞에서 무너지는 초심들. / 행 19:21-41.
묵상자료 4167호(2012. 10. 13. 토요일).
시편 38:15-18.
찬송 44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헤르만 헤세가 열여덟 살에 기계공장에 견습사원이 된 것은, 다른 경우처럼 가난이나 부모가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1877년 독일에서 태어난 헤세는, 열네 살에 당시로써는 들어가기 어려운 신학교에 좋은 성적으로 당당히 합격했지요. 목회자가 되는 게 사회적인 큰 성공을 뜻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대로만 지나면 헤세에겐 좋은 미래가 보장될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문학을 마음에 품고 있던 헤세에게, 억압적이고 세속적인 성공추구의 학교생활은 힘들었습니다. 헤세는 1년도 안 돼 학교를 자퇴했지요. 아버지는 분노했고, 헤세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다시 편입했지만, 그마저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결국 글에서처럼 열여덟 살에 헤세는 공장의 견습공이 됩니다. 하지만 1년만에 그만 두고 다시 서점에 취직했지요. 그러면서 헤세는 그토록 원하던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마침내 위대한 작가 헤르만 헤세로 가는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헤르만 헤세의 아팠던 청춘을 비교하는 건 불필요하겠지요? 누군가에게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추상적인 조언이 더 절실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헤세의 실제로 아프고 쓰라렸던 청춘기의 방황과 고통이, 훨씬 큰 위로와 자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청춘들에게는 그 다양한 조언과 경험이 모두 소중할 겁니다. 그로써 가장 빛나고 눈부시고 찬란하다지만, 한편으론 가장 어둡고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기도 한 그 단어를, 잘 극복하고 통과해내는 게, 청춘기의 가장 큰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9월 17일 방송>b.
2. 사람이 이성과 감성이라는 양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리나 앞뒤를 분별케 하는 이성이 있어서 예측과 기대가 가능하고, 저마다의 감성과 느낌이 달라서 그만의 특징을 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감성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은 조절 능력에 따라서 진폭이 너무 크고 달라, 때론 심각한 문제에까지 이르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난 에베소의 군중들이 등장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려는 바울 사도를 가로 막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아마도 하나님만 바로보고 살았던 사도에게는 어떤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헛된 낭비는 금물입니다. 시간도 열정도 생명도 때에 맞게 활용해야 옳으니까 말입니다. 제자들과 사도의 친구가 된 관리가 나타나서 바울을 멈춰 서게 한 일은 매우 이성적인 충고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향력 있는 서기장이라는 관리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군중들을 잠재우는 큰 역할을 하는 대목은 인상적이기까지 합니다. 서기장은 에베소 사람들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인정하는 말로 시작합니다(35절). 그런 연유로 경거망동해서는 안 될 것임을 말합니다(36절). 그리고 차분하게 이성에 호소합니다.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한 것도 아니고, 아데미 여신을 훼방한 것도 아닌 사람을 잡아왔으니, 정식 재판날도 잡고 시시비비를 가릴 총독이 있으니 거기에 맡겨야 한다고 말입니다(37-39절). 그렇지 않으면 불법집회에 대한 책망 받을 일만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40절). 이런 몇 마디에 그 큰 군중들이 이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겠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어린 아이들을 목말 태워 데모를 하는 한 떼의 무리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데모라는 것은 맨 앞에 두 사람이 들고 가는 플래카드 때문에 알게 되었습니다. 머리띠도 험악한 구호도 싸움에 임하는 막대기도 없었지만,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는 것으로 사람들의 잠든 의식을 깨우는 일을 하고 있다는 해석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 매체가 충실하게 알린다고도 했습니다. 참 부러운 장면입니다. 하물며 복음을 전하는 방법도 그 보다 더 성숙한 모습이어야 하겠습니다. 억지스럽게도 아니고 전사(戰士)처럼도 아니게 말입니다.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을 움직이는 최선의 방법으로 말입니다.
3. 사람에 대한 실망은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해득실, 권력에의 추한 욕망으로 이성과 양심을 저버린 경우들 말입니다. 그래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구나 하고 절감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