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하나님을 떠나게 될 때. / 미 2:1-13.

박성완 2019. 5. 13. 02:47

묵상자료 4190(2012. 11. 5. 월요일).

시편 45:1-5.

찬송 33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의 없는 사람들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란 일상에서 무시 못 할 수준입니다. 예를 들어서 갓길 타고 들어와서 새치기 하는 운전자, 지하철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마구 밀고 들어오는 승객들, 예의 없습니다. 담배를 피우며 걸어가는 남자 때문에 담뱃재가 손등에 떨어져서 화상을 입은 적도 있고요, 휑하니 달려가는 한 여성의 커다란 백에 팔을 긁힌 적도 있습니다. 옆 자리에 앉아 있는 학생은 볼륨을 한껏 높여서 음악을 듣는데, 도대체 이어폰을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조용한 실내에서 혼자서 큰 목소리로 통화를 하는 용기는 대체 어디에서 생기는지 모르겠습니다. 돌아서서 예의 없는 사람들이라고 욕하고, 그들이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요, 오늘도 내일도 얼마든지 똑 같은 일은 또 당할 수 있습니다. 그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고 예의가 없다고 화를 내야할까요? 스웨덴의 언어학자였던 헬레나 노르베리 호즈는 토속어 연구를 위해서 라타크를 갑니다. 그곳에 머물면서 라타크인 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요. 그래서 쓴 책이 [오래 된 미래, 라타크로부터 배운다]입니다. 책에는 이런 목격담이 등장해요. 화물 트럭을 타고 여럿이 함께 가는데, 그 중에 델리에서 온 인도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몸을 몸씨 비틀자 채소 자리 위에 앉아 잇던 라타크인 아저씨가 자리를 양보했지요. 그런데 아이들은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차가 길 가에 서서 쉬는데, 학생들은 라타크인에게 마치 하인에게 명령을 하듯 찬 물을 끓이라고 합니다. 참 어이없을 정도로 예의 없는 행동이었지요. 라타크인은 어떻게 했을까요? 싫은 내색 하나 하지 않고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그 일을 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건 주변에 있는 나이든 라타크인들도 별다른 간섭 없이 그냥 웃고 떠들고 있더라는 거지요.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라타크에서 가장 심한 욕설은 슌찬인데요. “화를 잘 내는 사람.” 이런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화를 내는 것이 가장 나쁜 행위라는 거지요. 억지로 화를 참는다는 이야기가 아녜요. 정말로 화가 나지 않으니까 화를 안 내는 겁니다. 그 비결은 자기 잣대로 남을 비판하거나 몰아세우지 않는데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을 맺었지요. “사물이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달리기보다, 그들은 복되게도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데 있어서 예의는 물론 필수입니다. 하지만 예의가 없다고 또 그렇게 까지 화를 낼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화를 내는 이유는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건 순전히 내 잣대 때문일 수 있고, 또 무엇보다 화를 낸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이나 상황을 바로잡고 싶다면, 화를 내거나 불평하지 말고 예의를 갖춰서 내 의견을 말하기. 어떨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827일 방송>

 

2. 이번 한 주간은 구약 미가서를 본문으로 묵상하려고 합니다. 성경읽기표는 어제부터 미가서를 취급하고 있어서 부득불 오늘은 2장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미가는 유다왕 히스기야(주전 728-678) 시대에 활동했던 예언자로, 전체적으로 3가지 주제를 담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1-3장은 심판에 대한 경고를, 4-5장은 회복에 대한 예언을, 6-7장은 회개의 촉구를 내용으로 한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노하심을 밝히고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어느 시대나 모든 문제의 발단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데서 시작하고 있음을 눈 떠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반드시 저지르게 되는 것들이란 온갖 악행으로 나타난다고 말입니다. 이미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것으로 만족치 못하고 오히려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만행을 거리낌 없이 행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악행은 미가 시대나 지금 우리 시대나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현상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권력자나 부자들 그리고 지도자들이 이런 악행에 가담하게 될 때, 그 결과는 심각하다는 점입니다물론 그 피해자들은 아무런 대항할 힘도 의지도 없는 일반 서민이고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런 악행에서 취한 부귀영화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둔갑시키기까지 하니 말입니다교회 지도자들이 힘센 자들에게 빌붙어서 아부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소행을 알고 계신다.

 

3. 어제 오후에는 세 곳을 심방했는데, 한 곳은 이사 간 교우 댁을, 두 곳은 병원이었습니다. 기쁜 일 하나, 슬픈 일 둘. 이것이 우리의 삶의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 어느 곳이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