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미움으로 바뀌는 까닭은. / 갈 4:12-20.
묵상자료 4223호(2012. 12. 8. 토요일).
시편 54:4-7.
찬송 50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천연이라는 글자 뒤에 또 다른 글자가 갑자기 눈에 크게 들어오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소금을 더 넣고 소금 통을 막 내려놓는데, 천연에 이어지는 다른 글자들이 보입니다. 주방 가루비누라는 글자였습니다. 당장 물을 틀어 정신없이 입안을 헹궜습니다. 천연 세제라니 괜찮겠지, 나물 한두 가락 정도니까 괜찮겠지, 계속 마음을 진정시키며 행궤 냈습니다. 다행히 걱정할 정도는 아닌 듯 했습니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니 착각할 만도 하다 싶었습니다. 우선 통이 소금통과 비슷했습니다. 거기다 통에 쓰인 의성어까지 전혀 의심 없이 소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정관념을 깨는 것도 좋지만, 고정 관념화된 모형이나 표현법을 갑자기 바꾸는 것도, 때론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런가하면 바깥에 분명 뿌려 쓰는 주방 가루비누라고 쓰여 있는데, 무작정 소금이라고 착각한 자신의 부주의도 위험한가? 며칠이 지나도 괜찮으니까 가족들이 농담도 했습니다. “천연재료라는 게 좋긴 하나보다. 아무런 탈도 없으니.” “거기 회사에 전화해서 통 모양도 바꾸라고 조언해 줘.” “조언은 무슨 순전히 네 부주의 탓이니 덜렁대지 좀 말고 살아라.” 정말이지 정신차려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소금과 설탕을 착각하는 정도는 참 귀여운 실수다 싶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9월 21일 방송>b.
2. 사랑과 미움은 그리 멀리 떨어진 주제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했을 때, 그에 비례해서 미움도 커진다는 것은 겪어 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일입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과 갈라디아 교회 교인간의 관계에서도 그런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에 대한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의 첫 인상은 약함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약함이 무엇이었는가를 짐작케 하는 단서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너희가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는 구절입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도 바울의 초상화나 조각상은 그 흐릿한 눈망울 때문에 병약한 사람이었으리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평생 그 흐릿한 눈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을 것이며, 본인 자신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토록 도움을 주고 싶어 했고 사랑했던 관계가, 어떻게 해서 원수처럼 달라지고 말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앞서 언급했습니다만, 사랑과 미움은 지척에 있는 이웃 사촌 같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눈이라도 빼 줄 것 같은 사랑의 관계이지만, 조금만 서운하고 조금만 관심을 주지 않으면, 당장 원수처럼 미움의 대상으로 돌아서게 된다는 것이, 참 약하디 약한 인간의 내면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누군가가 이간질한다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겪이 될 것입니다. 사도의 일생에는 그런 기름 노릇하는 사람들이 항상 따라다녔다고 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로 율법주의자들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요즘 이념주의자들처럼, 전혀 들을 귀가 없고, 무조건 싫어하고 반대하는 부류의 사람과 같다 하겠습니다. 꼴통 진보, 꼴통 보수라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어떻게 100% 나쁜 사람이 있고, 100% 좋은 사람이 있을까요? 이 점은 좋으나 저런 면은 싫을 수 있어야 제대로 된 평가일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사랑과 미움 그리 멀리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언제든 사랑이 미움으로, 또 미움이 사랑으로 뒤바뀔 수 있음을 생각하며, 우리의 약함을 주님께 맡겨야 하겠습니다.
3. 여행에서 돌아오신 분, 어려운 질곡에서 빠져나오신 분, 그리고 아무 일없이 그날이 늘 그날이신 행복하신 분.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