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종말의식으로 살아야 할 이유. / 살후 2:1-12.

박성완 2019. 5. 15. 02:50

묵상자료 4229(2012. 12. 14. 금요일).

시편 55:15-19.

찬송 22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낭만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실현성이 적고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라고 풀이 돼 있습니다그러니 낭만적이라거나 낭만주의 낭만주의자라는 말에서는, 대개 현실과 동떨어진 몽상적인 태도가 연상됩니다. 서정적이면서도 감정에 충실한 그럼 모습이 연상되지요그러니 비현실적이거나 무책임하고 충동적인 분위기도 느껴집니다. 낭만은 물론 실제로 그런 뜻이었습니다몽상가나 상사병에 걸린 젊은이들을 뜻했지요. 하지만 예술사에서의 낭만주의의 의미나 유래나 뜻은 훨씬 모호하고 복잡합니다. 미술사학자인 윌리엄 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낭만주의의 의미는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18세기 말 드레스덴 출신 비평가인 슐레겔 형제가 처음으로 문인과 미술가에 대해서 낭만주의자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1798년 형 프레데리히 슐레겔이 계간지 <아테네움>에서, 낭만주의 시를 진보적 보편 문학으로 기술함으로써최초로 낭만주의를 정의하고자 시도했다. 그 정의는 곧 독일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현대 세계와 고전적인 고대세계가 정신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몽상가적 낭만주의와는 좀 다릅니다. 고전주의라는 전통적 형식을 반대하고 거부하면 무조건 낭만주의로 여겼으니까요. 그러니 19세기 초에는 낭만적인 사람이 곧 당대 현실에 용감하게 맞서는 사람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하긴 낭만적이려면 용기가 필요하지요. 당장에 현실적인 일이나 직업 수입 지출에도 개의치 않고, 때론 감정에 충실한 이탈도 감행해야 합니다그래서 위험하고 어려운 게 낭만이기도 합니다. 미술에서 그런 낭만주의를 주도한 장르 중의 하나는 뜻밖에도 풍경화였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926일 방송>a.

 

2. 제가 어린 시절 저의 어머님 세대는 <고대가>라는 찬송을 많이 불렀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를 고대합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고대가>는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가르쳤던 당시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민족상쟁의 동란을 겪던 시절에, 어쩌면 그 보다 더 잘 어울리는 찬송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종말 의식은 항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하루에도 수 만 가지 이유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있으며, 우리들 역시 언젠가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포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개인적인 죽음을 자신의 종말이라고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그리 멀리 떨어진 다른 사람의 얘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가 종말을 자주 가르쳐야 할 까닭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얘기할 때 귀를 막을 게 아니라 오히려 경청해야 할 일이겠습니다. 사도는 지나친 종말 관심으로 손발을 놓고 살다시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던 모양입니다그래서 종말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를 느끼게 하고자 친절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가르침에 홀리지 말 것과,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살피라고 말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종말은 우주적 종말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기 직전의 세상을 말입니다. 먼저는 배도하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잘 알려진 유명 목사가 태도를 바꿔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식으로 사람들을 흔들어놓는 일을 말합니다. 성경의 말씀들을 한 마디로 진흙구덩이에 던지는 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불법의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칭 하나님이라고 떠벌립니다. 문선명 같은 이가 그렇고, 사이비 예수들도 그런 사람들 중에 속합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옥석(玉石)을 구별하는 일은 우리들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던 그것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까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말씀입니다.

 

3. 새벽에 학교를 가는 아들 녀석을 위해서 부재자 투표를 하느라 묵상이 늦었습니다. 저는 훌륭한 후보에게 한 표를 던졌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