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잡힌 삶을 살아야. / 살후 3:6-18.
묵상자료 4230호(2012. 12. 15. 토요일).
시편 56:1-4.
찬송 37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오페라를 작곡하지는 않았지만, 200여 편의 칸타타를 작곡했습니다. 가사가 있는 다 악장 성악곡을 가리키는 칸타타의 어원은, 이탈리아의 칸타레, 노래하다 라는 말에서 왔고요, 기악곡을 뜻하는 소나타와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바흐의 수많은 칸타타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칸타타하면, 역시 <커피 칸타타>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커피 중독에 빠진 딸이 노래합니다. “아, 커피가 얼마나 맛있는지, 천 번의 키스보다 사랑스럽고, 맛좋은 포도주보다 부드럽지요. 커피, 난 커피를 마셔야 해요. 누가 나에게 즐거움을 주려거든. 아, 나에게 커피 한 잔 따라주세요.” 1723년이 아니라, 2012년이라고 해도, 딸이 이렇게나 커피에 푹 빠져 있으면, 어떤 아버지라도 걱정스럽겠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경고합니다. “커피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혼 파티도 산책도 없으니 커피를 포기하거라.” 하지만 아버지의 무서운 으름장도 딸의 커피사랑을 식게 만들 수는 없었지요. 딸은 이렇게 말대꾸를 합니다. “결혼 서약으로 내가 원할 때마다 커피를 만들어 마실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 그가 맹세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신랑감도 내 집에 올 수 없어요.” 멜로디도 산뜻하고 가사도 재미있는 <커피 칸타타>. 바흐는 어떻게 이 곡을 만들게 됐을까요? 그는 아이제나크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났지만요, 라이프치히에서 평생 일하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라이프치히는 중세 이전부터 북동 유럽의 교역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또 1685년에 커피하우스가 생길 정도로 세련된 문화를 자랑하는 곳이었지요. 바흐는 1723년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에서 합창 지휘자로 일하면서, 교회 바로 옆에 있는 짐머만 커피하우스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11년 동안 음악을 연주했는데요. 처음에는 부수적인 생활비가 필요해서였지만, 궁정 작곡가 칭호를 받은 후에도 계속 커피하우스에서 연주를 합니다. 그가 <커피 칸타타>를 작곡한 것도 바로 이때 일입니다. 커피를 무척 좋아했고, 즐겨 마시기도 했지만요, 짐머만이 자신의 커피 하우스를 홍보할 목적으로, 커피에 관한 작품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바흐의 커피 칸타타는 요즘으로 말하면 CF음악이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바흐가 이 곡을 작곡했던 1723년에, 커피는 아라비아의 포도주로 일컬어지면서, 상류층에서만 즐기는 외래의 기호품이었지요. 그러다 바흐의 <커피 칸타타> 덕분 이었는지, 거리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커피하우스 덕분이었는지, 점차 모두가 즐기는 기호품이 됐다고 합니다. 바흐의 색다른 면을 볼 수 있는 <커피 칸타타>. 종교음악 작곡가가 아니라, 광고음악 작곡가로써의 그의 모습을 떠올려보면서, 한번 들어볼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9월 26일 방송>
2. “죽을 힘을 다해도 사는 것은 너무 팍팍합니다.” 오늘 금남시장을 지나가다가 노점상들이 하는 말이었습니다. 일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가장 멋진 모습일지 모릅니다. 죽을 정도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땀 흘려 일하고 마시는 냉수 한 잔이나, 따뜻한 밥 한 그릇이 얼마나 달콤하고 맛있는 지는 경험으로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일하지 않고 먹고 마시며 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를 더욱 더 힘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규모 있는 삶>을 세 번이나 말하고 있는데, 그 의미를 불성실하고 무위도식하는 무질서한 생활이라고 주석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규모 없는 삶의 원인을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이라는 재림에 대한 생각이 지나쳐서, 이 세상의 삶을 무시해 버리는 때문이라고 풀이합니다. 기독인들 중에는 육적인 생활을 소홀히 여기고 대신 영적인 생활에 치우친 이들이 있습니다. 육과 영, 현실과 이상은 분명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이지만, 어느 것 하나도 피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딘가를 향해 걸어갈 때 한 발을 땅에 붙이고, 다른 한 발을 공중으로 들어 올려서 나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는 사람을 현실주의자라고 하고, 두 발을 다 공중에 들고 살려는 사람을 신비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둘 다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입니다. 반드시 한 발은 땅을 밟아야 하고, 다른 한 발은 공중으로 들어 올려야 합니다. 육과 영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다 균형을 이뤄야 하며 성실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두 차원을 관리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입니다. 땅의 시민으로써 의무를 다할 뿐 아니라, 하늘의 시민으로써 의무를 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균형 잡힌 삶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더욱 보람 있고 자랑스럽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한 발은 땅에, 다른 한 발은 하늘로 알맞은 속도로 교차해 가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