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완덕의 삶을 지향하며. / 벧후 1:1-11.

박성완 2019. 5. 15. 02:55

묵상자료 4232(2012. 12. 17. 월요일).

시편 56:10-13.

찬송 42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지요과꽃 예쁜 꽃을 들여다보면꽃 속에 누나 얼굴 떠오릅니다. 시집간 지 어언 3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나요.” 철없던 시절에 멋모르고 불렀던 노래지나고 보니 참 애틋한 가을노래였습니다. 도대체 누나는 얼마나 시집살이를 하고 있기래, 3년이나 소식이 없을까? 별 일은 없을까걱정도 되고요. 그저 햇볕을 좋아해서 볕이 잘 드는 곳에 심으면진분홍색 꽃을 수더분하게 피워내는 과꽃. 과꽃은 가을이 올 때 피고국화는 가을이 갈 때 이어 온다고 했습니다그리고 그 사이에 맨드라미코스모스쑥부쟁이구절초 같은 가을꽃들이 있지요. 그런데 기분 탓일까요가을꽃은 봄꽃이 주는 찬란함 대신 애잔함이 있습니다. 봄꽃들이 단단한 나무 가지에서 탄성을 지르면서 위풍당당하게 핀다면, 가을꽃은 그야말로 의지가지없이 땅 위에 저 홀로 피어서바람 불 때마다 위태롭게 휘청거립니다. 게다가 결실의 계절에 피는 꽃이라니요. 사람으로 치면 남들 다 일가를 이룬 나이에저 혼자 이제 겨우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된 형국입니다. 매화처럼 매서운 추위를 이겨낼 기상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이제 곧 찬 서리 내리고 햇볕도 인색해 지면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이렇다 내 세울 만한 자랑거리가 없어서, 꽃들의 세계에서는 풀이나 매 한가지로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집에나 가을꽃이 있습니다부모 눈에 제일 밟히는 자식입니다. 저 혼자 열매가 없는 것 같아서 고개를 들지 못하지만그러나 꽃은 꽃인 것으로 충분합니다. 멀리 떠나지 않고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꽃들을 피워 올린 것만으로도,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것만으로이미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고개를 들고 나를 보는 이를 향해서가을꽃처럼 꾸밈없이 편안하게 미소 짓기를요. 이 아름다운 계절에.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927일 방송>

 

2. 오늘부터 닷새 동안 베드로후서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우리는 베드로후서가 유다서와 유사한 가명(假名)서신이라고 배웠습니다. 아예 유다서를 전거로 삼아서 사도적인 교훈 전승 등을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베드로의 서신이라는 주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서신의 내용이나 배경이 적어도 2세기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점이나,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인식도 사도 바울과 완전히 다른 점을 들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의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의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나누어 주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1). 기독교 신앙이 위협을 받고 있던 시절임을 생각한다면, 초기 기독교 문서들이 혼란 속에 있는 교회를 지도하는데 있어서 사도의 권위가 절실했을 것이며, 그 결과 지나칠 정도로 사도의 저작임을 강조할 필요를 상상해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신의 가치는 2세기의 교회 상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주제는 덕 있는 생활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조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덕목들은 믿음으로 시작하여 사랑에서 절정을 이루는 내용인데, 갈라디아서 5장의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 믿음이고, 새로운 삶의 완성을 사랑이라고 이해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 구절 외에 두 번 다시 믿음과 사랑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런 이해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2세기 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이 무엇이었는가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바로 5-7절에서 강조하는 내용들과는 정 반대의 삶을 살고 있었으며, 그 문제들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과연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강한 의문을 갖게 한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 역시 과연 기독인다운 삶일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세속화 되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자조 섞인 교훈들을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강조하는 완덕(完德)의 삶은 믿음에 이르는 전제가 아니라, 믿음의 열매여야 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