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차원, 이성의 차원. / 요 6:15-27.
묵상자료 4257호 (2013. 1. 11. 금요일).
시편 시 65:1-4.
찬송 45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 개의 동으로 이루어진 전자상가가 순차적으로 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유는 뻔합니다. 오래 됐기 때문에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버려지는 건 오래 된 건물만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지난 40년간 시간의 퇴적층을 쌓아온 사람들도 함께입니다. 아무리 서운하고 억울한들, 그들에게는 정책을 철회시킬 힘이 없습니다. 황정은의 소설 [백의 그림자]는 세운상가로 짐작되는 전자상가를 배경으로, 그 공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공간이 사라지고 공간과 함께 사람들도 사라지고, 그리고 또 무엇이 사라질까요? 주인공 은교와 무제가 나누는 대화는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오문사라고, 할아버지가 전구를 파는 가게인데요. 전구라고 해서 흔히 사용하는 알 전구 같은 것이 아니고요. 한 개의 20원 50원 100원가량 하는 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전구 조그만 전구들이거든요. 오문사에서 이런 전구를 사고 나면 반드시 한 개가 더 들어 있어요. 20개를 사면 21개, 40개를 사면 41개, 50개를 사면 51개, 100개를 사면 101개 하며. 매번 살 때마다 한 개가 더 들어 있는 거예요. 잘못 세는 것은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하나뿐이지만, 반드시 하나 더가 반복되다 보니까, 우연은 아니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느 날 물어봤어요. 할아버지가 전구를 세다말고 나를 빤히 보시더라고요. 뭔가 잘못 물었나보다 하며 긴장을 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까 입을 조금씩 움직이고 계세요. 말하려고 애를 쓰는 것 처럼요. 그러다 한참만한 말씀하시길. 가지고 가는 길에 깨질 수도 있고, 불량품도 있을 수 있는데, 오문사 위치가 멀어서 손님더러 왔다갔다 하지 말라고, 한 개를 더 넣어준다는 것이었어요. 난 그것을 듣고, 뭐랄까 순정하게 마음이 흔들렸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무제씨, 원플러스 원이라는 것도 있지 않아요? 대형마트 같은 곳에서. 무제씨도 그런 것 사 본적 있나요? 음 가끔은. 하나를 사면 똑 같은 것을 하나 더 준다는 그것을 사고 보면, 이득이라는 생각은 들지만요, 그게 배려라거나 고려라는 생각은 어째선지 들지 않고요. 그러고 보니 오문사의 경우에는요, 조그맣고 값싼 하나일 뿐이지만, 귀한 덤을 받는 듯해서 난 좋았어요.” 오래됐다는 이유로 공간이 사라지고, 그 공간에 살던 삶이 사라지고, 함께 사라지는 건 원 플러스 원과는 다른 배려와 귀한 덤. 그런 것들이 아닐까 싶어서, 갑자기 마음 한 구석이 시려졌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10월 17일 방송>
2. 어느 핸가 미국에서 오신 친구 목사님에게서 뉴욕에서 기도원을 운영하신다는 얘기를 하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는 곳에는 어김없이 기도원이 필요하다는 얘기며, 그게 성경적이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어제 본문 말미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산으로 가신 것을 보고, 기도하러 가셨다고 결론을 지은 것입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주장입니다. 주님께서 이른 새벽 미명에 기도하시는 모습을 자주 소개하는 복음서를 통해서, 새벽 기도회의 창시자로 부를 만 하듯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정확히는 모르는 일입니다. 분명한 것은 혼자 있고 싶으셨다는 점이고, 그런 혼자만의 시간에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모습은 기도가 적당한 일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버나움으로 갈 예정으로 배를 타고 기다리는 제자들 앞에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칩니다. 제자들이 이런 난국을 피하려고 노를 젓는 와중((渦中)에, 파도치는 바다위로 주님이 걸어오신 것입니다. 최근에 대통령 인수위 위원으로 임명된 한 인사가 기독교인으로 <창조과학회>의 회원경력을 가졌다고 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진화론이 대세인 과학시대에 창조론을 주장하는 인사가 어떻게 교육 정책을 입안하고 적합한 인재를 선별하는 작업에 도움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찬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점을 증명하려 한다거나, 빌라도의 계단을 오르내리셨던 그런 물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신앙에 유익을 줄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의 생각은 신앙의 차원과 이성의 차원은 다른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신앙의 차원은 하나님과 관계된 영역을 진술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물 위로 걸으신 것을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만 신앙이 성립되거나 진정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만 이해되는 영역인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서 과학의 영역은 사람들의 이성에 머무는 한계점이 있습니다. 그 결과 이성적인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위로 걸으신 주님을 제자들처럼 우리 역시 놀람과 두려움으로 맞아야 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주님은 그러실 수 있는 분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때문입니다. 신앙의 대상을 사람의 이성으로 분석하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