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 행 10:34-38.
묵상자료 4259호 (2013. 1. 13. 주현절 후 첫째 주일).
시편 시 65:10-13.
찬송 20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메일을 보냈는데 상대방이 며칠이고 읽지 않을 때, 문자 메시지를 보냈는데 아무 답이 없을 때, 전화 받을 때 아파서 입원중이라고 했는데, 문병 오겠다는 말이 없을 때, 내가 그렇게 희미하고 의미 없는 존재인가, 맥이 빠지기도 합니다. 3일 동안 결근을 했는데도 같은 사무실 사람들이 궁금해 하지 않을 때는, 출산 휴가를 마치고 나와 엘리베이터나 복도에서 처음 마주치는 건데도, 아기 소식을 궁금해 하지 않을 때는 너무도 서운하고 쓸쓸해지기도 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별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원래 무심한 사람이거나 그 순간에 인사를 잊었거나 할 뿐이지요. 그런데 이쪽에선 서운함만이 아닙니다. 때론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혹시 잘못 살았나, 자책을 하게 되지요. 하지만 늘 그런 게 아니라면,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케 하는 그런 자책도, 가끔은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12년 9월 26일 방송>
2. 사도행전은 베드로의 행적과(1-12장) 바울을 행적으로(13-28장)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적어도 사도들의 서열을 확실히 세워두었다는 견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위치를 더욱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는 견해가 다 가능해 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의 설교의 중심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라는 주제어에 우리를 주목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조차도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있음을 주목하게 합니다(38절).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 결론은 기독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많은 충돌과 거부감을 주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역설이고 모순인 때문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충분히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놀라운 일들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일 수 있고, 38년 된 반신불수를 고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자신이시면서도 한없이 자신을 낮추시고 끝까지 아버지 하나님께 철저하게 복종하는 자세로 일관하셨습니다. 우리로 하나님께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34-35절).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나 하나님을 알려는 노력은 계속돼 왔습니다만, 쉽게 알려지지 않는 베일에 싸인 하나님으로 생각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에게 알려진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그 어느 하나님보다 명백하게 소개되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며 세상을 다스리시는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시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 같은 어리석고 잘못된 일이며,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보다 더 지혜롭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38절).
많은 기독교인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들 인간들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듯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 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듯이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이 부어지기도 하고 그 은총이 닫히기도 하는 줄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적극적 사고방식이 도움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능동적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능동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에 수동적이 되는 것이야 말로 가능한 일이 아닐까 말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수동적 의지인 노예의지를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니까 그대로 따른 것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3. 오늘은 엄현섭 총회장께서 저희 교회에 초청 설교자로 오십니다. 은혜의 말씀을 기대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