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란 이런 것이다. / 막 1:29-45.
묵상자료 4262호 (2013. 1. 16. 수요일).
시편 시 66:8-12.
찬송 40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림과 영화의 관계는 꽤 오래 됐습니다. 많은 감독들이 그림의 구도를 통째로 빌려와서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했고요. 때로는 그림을 영화 속의 소도구로 활용하기도 했는데요.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에서 갈라휠러 윌 콕스가 쓴 시 <고독>의 첫 구절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이 구절이 더 강열하게 와 닿았던 데에는 눈은 울고 있고, 입은 웃고 있는 기괴한 한 남자 그림이 주는 효과가 컸습니다. 자, 이 그림은 누가 왜 그린 작품일까요? 주인공 오대수가 아무 영문도 모르 채, 15년 동안 갇혀 있던 방의 걸린 그림은,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가 1891년에 그린 작품 <슬퍼하는 남자>입니다. 예수가 가시 면류관을 쓴 채, 승천하기 직전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요. 사실 이 순간을 그린 작품들은 무수하게 많지요. 대부분 인류의 죄를 대신한, 예수의 숭고하거나 비장한 분위기로 그려져 있는데요. 제임스 앙소르는 독특하게도 눈은 울고 있지만 입은 웃고 있는, 선과 악, 고통과 희열이 동시에 공존하는 기괴한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에 그의 어머니는 가면 가게를 운영했다고 해요. 화가가 된 앙소르는 가면을 쓰고 카니발을 즐기는 고향 사람들을 그림 속에 자주 등장시켰습니다. 앙소르에게 가면이란 온갖 추악한 인간의 욕망을 가려주는 도구였습니다. 그는 그런 세상에 대한 공포를 그림으로 들어냈지요. 시대적인 상황도 어지러웠습니다. 노동자들의 파업과 폭동이 이어졌고, 종교 전쟁까지 일어났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담은 그림이 1889년에 그린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입니다. 예수가 나귀를 타고 브뤼셀이 들어오는데, 어느 누구도 쳐다보지 않지요.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자신을 감춘 채로, 예수를 외면합니다. 가면을 쓴 사람들은 산업혁명 이후에 득세한 부르조아 계급을 뜻하고요. 물질적 풍요와 합리적 사고가 추앙받는 시대였지만,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외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100여 년 전의 작품이지만 앙소르의 차가운 은유는 갈수록 더 유효해 지는 것 같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합리적인 사고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스스로 묻게 만드니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10월 24일 방송>
2. 가버나움 회당에서 나오면 베드로의 처가를 방문하게 됩니다. 열병(장티푸스)를 앓고 있던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29-31절), 저물어 해 질 때까지 각색 병인들을 고치시고, 귀신들린(미친) 사람들까지 고치셨습니다(32-34절). 그런 분주함 속에서도 이른 새벽에 일어나 기도시간을 가지신 주님은, 찾아온 세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다른 마을로 가자고 하십니다. 기다리는 복음이 아니라, 찾아가서 만나주시는 복음을 전하시려는 의지를 밝히십니다(35-39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문둥병 환자를 만나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는 말씀 한 마디로 고쳐주시고, 침묵 명령을 내립니다(40-45절). 만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적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유감없이 들어낸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고 말입니다. 성경의 독자들은 누가 왜 그런 일을 하시는지 주목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그 마음으로 마음이 공허한 사람들과 질병에 묶여서 사람구실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자유와 기쁨을 주시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답게 살아 보라고, 이미 주어진 모든 가능성과 잠재력을 발휘해 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신의 이웃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값진 삶을 살아보라고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베풀어 주시는 구원행동, 복음이라고 말입니다.
3. 여수에는 언제나 기쁘게 맞아 주는 제자가 있습니다. 어설픈 선생의 강의를 참고 들어 준 고마운 제자입니다. 그러니 선생보다 훨씬 훌륭한 목회를 하고 있어서 자랑스럽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