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힘든 손마저 거절한 까닭. / 막 3:7-19a.
묵상자료 4267호 (2013. 1. 21. 월요일).
시편 시 68:1-3.
찬송 25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왕이면 주는 사랑보다 받는 사랑이 더 컸으면 싶은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러나 유치환은 <행복>이라는 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었지요.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이보다 행복하나니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이 말. 어째서일까요? 헤르만 헷세가 쓴 <아우구스투스>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아우구스투스를 사랑하며 호의를 베풀었는데 그것은 어머니가 이웃인 빈스 반겔에게 베푼 친절 덕분이었지요. 그는 천사와 같은 존재로, 착한 엘리자베스 부인을 위해서 소원 딱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서 이런 소원을 빌었지요. “모두들 너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라고요.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는 자라서 이런 어른이 됐습니다. 물건과 일이 그가 생각하는 대로 들어오고 되어갔다. 여자들은 애정을 가지고 그의 곁을 둘러싸고, 친구들도 그에게 무조건 열중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꿈꾸는 삶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아무런 불행이 없는 삶이 곧 불행이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마음은 공허하고 영혼은 병들어 갔지요. 너무나도 쉽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절머리가 났고, 아무런 욕망도 가치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어느 날 진실 없는 이 삶을 끝내기로 결심하고 독약을 마시려고 하는데, 빈스 반겔이 찾아와서 이 독약을 마셔버립니다. “너의 독은 내가 마셔버렸다.” 라고 말하면서 아우구스투스를 위해서 하나의 소원을 더 들어주기로 하지요. 아우구스투스가 빈 그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제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마력이 사라진 아우구스투스의 삶은 한 순간에 몰락해 버립니다. 앞 다투어 그에게 재물을 바쳤던 친구들은 사기꾼으로 그를 고소했고, 온갖 죄악이 폭로 되면서 감옥에 갇혀 버립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출옥했을 때, 그는 병들고 늙어 있었지만, 질식할 것 같았던 무서운 공허와 고독은 없었지요. 아우구스투스는 어떤 형태로는 사람들에게 소용이 있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누어주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지지요.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아름다웠던 시절에는 그토록 공허했던 세상이, 이제는 기쁨과 감동을 주기 시작한 겁니다. 그 근원에는 많은 불행 속에서도 미소와 노래, 예의와 행복을 잃지 않는 사람들, 그 생활의 기쁨이 있었지요. 생의 끝자락에 이르러서, 아우구스투스는 마침내 이런 깨달음을 얻습니다. “차츰 그의 기억도 아련해 지고, 세상을 줄곧 부정적으로 보며 살아온 것 같았다. 세상은 정말 멋지고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11월 6일 방송>
2. 오늘 본문은 갈릴리 해변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오자, 주님은 배 한척을 빌려 바다에 띄우게 하시고 그 배위에서 말씀을 전하신 일화입니다. 그런데 그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병든 사람들이 주님을 만지고자 밀고 당길 뿐 아니라, 너무 힘들게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10절). 제가 잘 아는 어느 국회의원 출신 목사님은 선거철의 비화를 들려주었는데,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사람들과 악수하느라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몸살을 앓곤 했다고 합니다. 손바닥을 쥐고 흔들어대는 사람들로 온 팔과 손목이 얼얼해졌었다고도 합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권력자로 부상할 때 얻게 될 이익을 바라고, 눈도장을 찍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찾아온 군중은 먼 미래를 계산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힘겹고 고달픈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도 고통에서 쉼을 얻을 수 없는 병든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들이 내미는 손을 거절하고 거리를 두고 싶어 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장은 질병이나 배고픔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주고 싶으셨겠지만, 주님이 생각하는 참된 기쁨을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복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 그 하나님이 지극한 사랑으로 그들을 항상 돌보시며 동행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죄와 죽음 아래서 신음하는 그들을 반드시 구원해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이 보다 더 시간을 다투어 알아야 할 말씀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중으로 하고 싶다고 미루곤 합니다.
3. 오늘과 내일은 신갈에 있는 루터대학교에서 루터교 찬송가를 고르는 웍샵이 있습니다. 통일 찬송가가 왜 필요한지 의문입니다. 각 교파는 자기 특성에 맞는 찬송가가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일본과 한국만이 통일찬송가가 있다는 것 알고 계십니까? 여전히 연합집회(?)를 위해서 불가피 하다고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