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 막 4:1-20.

박성완 2019. 5. 16. 02:50

묵상자료 4269(2013. 1. 23. 수요일).

시편 시 68:7-10.

찬송 37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이런은 24살에 장편시 <차일드 헤럴드의 편력>을 발표했는데요. 4주 만에 7쇄를 찍는 대성공을 거두지요. 당시 런던 사교계는 젊고도 열정적인 천재 시인에 열광했고, 바이런은 이렇게 말했지요. “자고 일어나자 유명해 진 것을 알았다.” 누군가는 이런 벼락같은 성공을 보고, 자조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노력하는 사람은 운 좋은 사람 이기지 못한다.” 라고요. 글쎄요. 씁쓸하지만 사실일지도 모르지요. 혁명이냐 역모냐, 천재나 광인이냐를 가리는 순간을 보면, 인간의 재능이나 노력보다는 하늘의 뜻에 달린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아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디 하늘의 뜻이 내 편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축복을 기원하는 것도 어쩌면 그래서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이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런 자문을 던질 때, 떠오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멘센 드라크로아가 파리의 생 쉘피스 성당 벽에 그린 <천사와 싸우는 야곱>이지요. 오른 쪽 아래로 야곱이 벗어 던진 겉옷과 창이 보입니다. 그는 맨 몸으로 커다란 날개를 달고 있는 천사와 한 쪽 손을 맞붙잡고 온 힘을 다해서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천사의 싸움 도저히 대하기 어려운 상대임이 분명한데, 야곱은 절대 포기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습니다. 고개를 숙여서 천사의 가슴에 들이밀면서, 한 쪽 다리를 들어 온 몸으로 천사를 밀어 붙이고 있지요. 이 둘은 밤이 새도록 이렇게 씨름을 했습니다. 누가 이길 것인지는, 야곱의 등에 비친 빛이 암시해 주지요. 천사는 야곱의 힘에 지쳐서 이미 뒤로 주춤 밀려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우리말에서 씨름한다.” 라는 말은 어떠한 대상을 극복하거나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온 힘을 쏟거나 끈기 있게 달라붙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야곱은 자신에게 벅찬 상대를 만나서, 밤새 씨름하면서 둔부의 뼈가 어긋나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천사를 붙잡고 그 손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토록 절박할 수밖에 없었던 건, 형 에서가 군대를 이끌고 자신을 죽이러 오고 있기 때문이었지만, 그가 집요하게 갈구한 것은 힘도 승리도 아닌 축복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와 또 그림을 보면서 축복이란 건 그렇게 받는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존 파울즈의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 나오는 구절처럼, “인생이란 결코 하나의 상징이 아니며, 수수께끼 놀이에서 한번 틀렸다고 해서 끝장이 나는 것도 아니고, 인생은 하나의 얼굴로만 사는 것도 아니며, 주사위 한번 던져서 원하는 눈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체념할 필요는 없습니다. 끝까지 버티고 견디고 이겨내면, 분명 그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축복의 힘이란 신비롭게도 한 번 받으면 영원히 지속되는 법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무엇과 씨름하든, 끝까지 해 보라고,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싶어집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115일 방송>

 

2. <씨 뿌리는 농부 비유>로 명명되곤 하는 본문은, 공관복음서가 모두 취급하고 있습니다(13:1-15, 8:4-10). 그런데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말씀이 바로 비유의 해설부분에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로 말씀하는 이유를 저희(외인)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2)는 구절인데, 말씀이신 하나님을 만나기도 전에, 어떤 사람은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으로, 또 어떤 사람은 아예 알아들을 수 없도록 하셨다고 한다면, 이 보다 더 심한 차별대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비유로 말씀하심은 예정된(?) 사람을 위한 특혜일까요?

   주석가들은 이 해설부분의 의도에 대해서 주목을 하자고 합니다. 이 해설이, 비유를 말하는 선포자들을 향한 말씀인지, 아니면 이 비유를 듣는 청중을 향한 말씀인지를 확인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 해설이 아무런 성과도 없는 선포에 체념하지 말라는 선포자를 위한 위로의 말씀으로 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듣는 자가 어떤 부류의 청중인지를 묻는, 듣는 자에 대한 경고인가? 하고 말입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선포자에게가 아니라, 청중에 대한 경고로 보아야 할 것이라며,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며, 그들이 낙심하지 말도록 격려하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이란, 마치 복음에 귀를 기우리지 않는 거대한 물결 같은 세상의 현상과 같다고 말입니다. 사실 저는 하나님의 넓은 생각을 저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을 때, 어거스틴이 가르쳐준 방법대로, 먼저 믿음으로 이해에 이르려고 합니다. 이해를 통해서 믿으려고 하지 않고 말입니다.

 

3. 금년 말까지 비록 시험판이긴 하지만 가칭 <루터교 찬송집>을 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