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막 6:30-46.

박성완 2019. 5. 16. 03:00

묵상자료 4277(2013. 1. 31. 목요일).

시편 시 69:5-8.

찬송 3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두 사람이 함께 전시회에 가서 같은 그림을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둘의 말이 서로 다릅니다. 한 사람은요, “, 그런 그림은 나도 그릴 수 있어.”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고요. 다른 한 사람은 , 내면세계를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대단한 작품이라.” 고 감탄을 아끼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를 두고 예술작품을 뚜고 평가뿐 아니라, 사람이나 상황이 대상이 되었을 때도 쉽게 생길 수 있어서요. 심지어 다툼으로 번지기도 하는데요. 가장 최악의 경우에는 밖으로 내든 속으로 삼키든 상대방을 이렇게 판단하는 겁니다. “당신의 수준이 그것 밖에 안 되다니 참 실망이군.” 알랭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어요. “우리가 관객으로써 어떤 화가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면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특징을 그 화가가 골라냈다고 판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저마다 다르다는 점이지요. 19세기는 사실주의를 중요한 미덕으로 삼던 시대였습니다. 특히 딜라 크로아라는 역사를 담은 대작들을 많이 그렸는데, 어느 날 한 친구가 그에게 아쉽다는 듯 말했습니다. “자네는 역사적인 장면을 놓쳤어. 어젯밤 영국 대사관에 들렸더니 이름 있는 거물 두 명이 붉은 예복과 푸른 예복 차림으로 참석한 걸 보았다네. 그 장면 충분히 역사화의 소재가 될법하지 않은가?” 그런데 돌아온 딜라 크로아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그런 거물급 인사는 나에게 필요 없네. 그저 붉은 옷과 푸른 옷을 입은 사내 둘만 있다면, 내겐 족한 것이지.” 친구가 중요하게 여긴 건 거물이었고, 딜라 크로아가 중요하게 여긴 건 붉은 옷과 푸른 옷을 입은 사내 둘이었습니다. 친구가 놓쳐서 아깝다고 생각한 것이 그에게는 그다지 아까울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니 자연히 관심사도 다르고 판단도 다를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면 평소에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사는지가, 결국 그 사람의 수준이라는 뜻이 될 텐데요. 신영복교수의 책 [감옥으로부터 사색]에 나오는 이 한 구절이 뜨끔하게 와 닿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처지에 눈이 달리기 마련이고, 자신의 그릇만큼의 강물밖에 뜨지 못합니다. 이러한 자신의 제한성과 특수성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한, 자기의 생각과 견해를 넓혀나가기는 몹시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수준이 높은 사람이란 자신의 제한성과 특수성을 깨달은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주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넓히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 아닐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1030일 방송>

 

2. 한 때 전도라는 말과 선교라는 말의 구별이 필요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전도란 문자 그대로 진리인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선교는 진리를 더 넓게 편다는 의미입니다그러니까 선교라는 말이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왜 이 용어가 구별이 필요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바로 저입니다. 제가 선교에 발을 들여놓았던 2001, 저의 선교를 후원하겠다고 제안했던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가지고 계신 신학적인 이론과 목회적인 경험을 선교지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나눠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그 일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경제적인 부분을 맡아서 하겠습니다.” 그래서 선교는 그렇게 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지에서 만난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신학과 목회상의 갈증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문제들이 힘겹게 붙들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개척 수준인데, 모든 것이 열악했습니다. 거기다 질병에 묶인 교우들이 많았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 조언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 질병에 신음하는 사람들, 그리고 크고 작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안하시오, 감격스러운 삶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도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배고픈 무리들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지 않고는 차마 설교를 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서 기자는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을 덧 붙였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복음 전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부자들에게가 아니라,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아무 돈벌이도 없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해당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정한 의미를 38절에서 암시합니다. 전도자들에겐 반드시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하나님께 맞닿기를 바라신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그런 긍휼이 여러분의 마음에도 솟아나기를 바랍니다.

 

3. 묵상식구 박용연사모님(미국 오하이오 백인목회자 사모)께서 보령 강습회에 참석하셨습니다. 기뻐하셔서 참 반갑고 감사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