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의미를 찾을 때. / 눅 11:1-11.

박성완 2019. 5. 17. 02:34

묵상자료 4295(2013. 2. 18. 월요일).

시편 시 72:16-19.

찬송 44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갈등의 골이 깊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서, 어떻게든 다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중재에 나섰는데, 서로를 비난하는 이유가 똑 같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했고요,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참 블랙코미디 같은 그 상황을 보면서, 이솝 우화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가 떠오르더라고요. 워낙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요, 다시 한 번 들어볼까요? 여우가 두루미를 식사에 초대합니다. 두루미가 신나는 마음으로 여우의 집에 갔는데, 여우가 납작한 접시에 음식을 가지고 나오는 바람에, 입맛만 다셨지요. 그런 두루미 사정도 모르고 여우는 차려놓은 음식을 왜 안 먹느냐면서, 자기 혼자 냠냠 다 먹어버립니다. 화가 난 두루미가 그 다음날 여우를 식사에 다시 초대합니다. 그리곤 일부러 호리병에 음식을 내오지요. 너도 당해봐라 이런 속셈이었겠지요. 당연히 여우는 먹을 수가 없었고, 두루미는 어제 여우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보란 듯이 혼자서만 다 먹어버립니다. 처음부터 여우가 두루미를 일부러 약 올리려고 작정했던 것 같진 않아요. 둘은 사이가 좋았고요. 여우는 정말로 호의를 가지고 두루미를 초대했으니까요. 문제가 있었다면 아무 생각 없이 순전히 자기 입장에서 자기 방식대로 상대방을 대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요, 참 많은 인간관계의 갈등이 그렇게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그저 했던 대로 행동하고 말하던 것이 그렇게 얼마든지 화근이 될 수 있고,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요. 상대방이 마음이 상하고 똑 같은 방식으로 대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면서, 관계는 파탄에 이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은, 그 사람이 처한 입장이나 관점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입장 자신의 관점에서, 문제를 단편적으로 보고 대처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방식은 순전히 나의 입장 나의 관점이며, 그것은 좁은 시야일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경계하면서 시야를 넓히지 않으면, 언제든 또 얼마든 상대방에게 본의 아니게 불쾌함과 상처를 줄 수 있지요. 그래서 상처를 입은 상대가 똑 같은 방식으로 나를 대한다면, 평화란 그렇게 너무나도 쉽게 깨질 수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쓴 <티베트에서 온 편지> 중에 이런 글이 있어요. “모든 것이 다 인과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남의 입장을 자신의 입장처럼 생각하고 배려하는 자비심을 키워야 한다. 자비심은 남을 위한 배려처럼 보이지만, 이를 실천하기 시작하면,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있으니, 결국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셈이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1210일 방송>

 

2.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과,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 차이를 확인하게 합니다. 본문에는 한 초라한 군상(群像)들이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의 소시민들로 구성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손에 들려진 것은 종려나무 가지들이었고, 길에 깔려진 것은 자신들의 겉옷가지들이었습니다. 뭔가를 흉내 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간혹 구경했던 왕의 행차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과 잘 어울리는 왕으로 분장한 이의 모습입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이 바로 그 분입니다. 그리고 더욱 가관인 것은 그 나귀 새끼 등에 오르신 예수님을 향해서 소리소리 치는 목소리들입니다. “호산나, 호산나 !” 라고 말입니다. “우리를 구해 주십시오! 우리를 살려 주십시요!” 라는 소리입니다. 왕에게나 할 수 있는 말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옮겨본 것입니다. 어쩌면 어린 아이들의 소꿉놀이를 어른들이 연출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의미로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그동안 우리는 귀청을 찢듯 요란한 확성기 소리와, 억지 감동을 짜내려는 신파조의 애국자연하는 정치가들의 가두연설에서 식상할 대로 상했던 안 좋은 추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진정성을 찾아서 조용하고 낮은 소리에 귀를 빌려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런 심정으로 이 초라한 행렬을 살펴보고 싶어졌습니다. 모방이라는 말만 빼버린다면, 순수 그 자체인 모습 말입니다. 동원된 박수부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와서 진심으로 마음을 풀어놓는 사람들, 그들이 흔드는 종려가지나,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한 눈망울은, 조금도 거짓 없는 순도 100%의 샘물 같아 보입니다. 그들은 중산층에 대한 희망에서도 오래 전에 제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세상에서 버틸 힘마저 다 빼앗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희망이 생긴 것이고, 기쁨이 생긴 것이고, 삶의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서 우리가 되찾아야 할 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기독자가, 그리고 우리 주님이 그런 의미를 줄 수는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3. 지난 설 도봉산 정상 정복은 무리였던 모양입니다. 금요일부터 사흘간 된 몸살을 앓았습니다. 복통 몸살이었는데 예배중의 교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니 더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정상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