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제 모습을 되찾도록. / 막 11:27-12:12.
묵상자료 4297호 (2013. 2. 20. 수요일).
시편 시 73:4-9.
찬송 24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의심생 암귀/疑心生 暗鬼” 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의심은 암귀를 낳는다는 뜻인데, 여기에서 암귀란 원래는 어둠을 지배하는 귀신으로, 여기에서는 의심이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만든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일단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면, 멀쩡한 것도 수상하게 보이기 시작하지요. 자그마한 의심이 어떻게 불씨를 지펴서 파경에 이르게 하는지, 우리는 이미 많은 사례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의심하는 사람한테 왜 못 믿느냐고 덮어놓고 믿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저 믿는 시늉만 내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언제나 그렇듯 중요한 가치일수록 가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믿음이라는 길 역시 쉬운 길 일리 없습니다. 막심 고리키는[클링 사무긴의 생애]라는 소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된 믿음의 길은 불신이라는 사막을 가로 질러 놓여있지. 안이한 습관으로써의 믿음은 의심보다도 훨씬 더 해롭지.” 그러니 어쩌면 의심이란 믿음으로 가기 위한 필수 관문일지도요. 프란시스 베이컨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은 회의로 끝나고, 기꺼이 의심하면서 시작하는 사람은 확신을 가지고 끝내게 된다.” 영어에서 의심이 많은 사람을 다우팅 토마라고 부르는데요. 신약성서 요한복음의 일화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목격할 때 토마는 그 자리에 없었고, 그래서 이런 말을 하지요. “나는 내 눈으로 그 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 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 토마는 불경스러웠던 걸까요?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의 거장 카라바조는 이 일화를 파격적으로 뒤집습니다. 바로 <성토마의 의심>이라는 그림을 통해서지요. 카라바조는 예수의 왼손이 토마의 오른 손을 잡아 당겨서 토마의 손가락을 자신의 옆구리의 상처에 집어넣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성경에는 없는 장면이지요. 어찌나 상처가 깊은지 토마의 손가락이 푹 들어가는데, 놀라움을 넘어서 섬뜩함을 자아내는 묘사입니다. 결국 이 그림은 성직자들로부터 불경스럽다는 집중포화를 받았지요. 그러나 종교와 상관없이 이 작품이 인상적이고도 감동적인 것은, 성직자들이 불경스럽다고 했던 바로 그 장면. 토마의 손을 잡아 이끌어서 자신의 상처에 집어넣게 해 주는 예수의 모습입니다. 현재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세계적인 미술가 아니시카 프할 작품 중에 <성토마의 치유>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손이 닿지 않은 벽의 몸체에 예리한 칼집을 낸 것이 작품의 전부지요. 그런데 제목이 의심이 아닌 치유인 까닭은, 예수의 옆구리 상처가 토마의 의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치유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성토마의 의심> 그리고 <성토마의 치유>. 이 두 작품을 보면서 말로만 믿으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믿음을 주기 위해서 그만한 헌신이 있었는지 되묻고 싶어졌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12월 11일 방송>
2. 가끔 심야토론이라는 걸 보곤 합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인데도 불구하고 밀려도 너무 밀린다 싶은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준비가 잘 된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상대의 아킬레스건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화술로 아예 상대의 입을 봉쇄하는 경우가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토론의 본말을 빗겨가는 아쉬움을 갖곤 했습니다. 오늘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서의 토론도 그런 시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전 청결> 일화를 떠올리며 그렇게 하는 권세를 누가 주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럴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예수님은 그들의 아킬레스건을 잡아당깁니다.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의 권위를 물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를 부인 못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더 이상 논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주제를 빗겨가는 화술이어서 아쉬움을 금할 수 없지만, 그동안 숱한 논쟁에서 터득한 논법이었을지 모릅니다.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성전을 생각할 때,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던 주님은, 강한 인상을 남기면서까지 성전의 제 모습을 되찾으려 했을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쳐지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요? 과연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 가르쳐지고 있고 있을까요? 복음보다는 율법주의가,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사람의 노력과 업적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노래가. 그래서 결국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들어내려는 겸손하고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포기하고, 세상 속에 우뚝 솟아서 존경과 섬김을 받고 싶어 하는 교회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 주님은 채찍을 드시고 교회를 점령한 온갖 잡동사니들을 내쫓고 싶어 하실지 걱정은 되기는 한지, 아킬레스건을 잡아당겨 보았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