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면서. / 막 12:13-27.
묵상자료 4298호 (2013. 2. 21. 목요일).
시편 시 73:10-14.
찬송 28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로멩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던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소년 모모가 닮고 싶었던 사람은 빅토르 위고였습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빅토르 위고 같은 사람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하밀 할아버지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라고 했다.” 모모의 입을 통한 이 구절을 통해서, 로멩가리가 빅토르 위고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빅토르 위고를 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이라 믿었던 것 같습니다. 소설에서 하밀 할아버지는 모모에게 이런 말도 들려주는데요. 빅토르 위고가 쓴 작품 하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 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 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바로 작품 [레 미제라블/Les Mise rables]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인 장발장 그를 쫓는 자베르 경감은 물론이고, 모두들 희다 검다 이렇게만 나눌 수 없는 입체적인 캐릭터라는 점에서 놀랍습니다. 빅토르 위고가 무려 20여 년에 걸쳐 쓴 대하소설 <레 미제라블>은 뮤지컬로 만드는 게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이런 의구심을 떨치고 1985년 초연 후에 <뮤지컬 레 미제라블>은 런던에서 최장기 공연 기록을 갱신하고 있고, 지금까지도 40개가 넘는 나라에서 21개 언어로 공연되었고, 6천만 명 이상이 관람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작년부터 한국어 버전으로 막을 올렸지요. 그리고 이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 현재 극장에서 상연중인데요. 이렇게 <레 미제라블>은 그동안 영화 연극 뮤지컬 등 여러 장르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요. 혹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셨나요? 도대체 장발장은 왜 그렇게 자베르에게 쫓기는가에 대한 의문 말이지요. 이 의문을 영화나 연극 <뮤지컬 장발장>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축약 본에서도, 속 시원히 풀어주지 못했습니다. 그 답은 오로지 빅토르 위고의 원작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데요. 뮤지컬에서처럼 가석방 조건을 어기고 신분을 속이고 산 죄가 아닙니다. 원작에서 장발장은 19년의 형기를 마치고, “너는 자유다.” 라는 말을 듣고 출소합니다. 가석방이 아니라, 석방이었던 거지요. 자, 그렇다면 자베르는 석방된 장발장을 왜 그토록 끈질기게 추적했을까요? 뮤지컬에서도 자베르가 여러 차례 걸쳐서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장발장도 쉽게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밀리에르 신부에게 문제의 그 은촛대를 받은 뒤에 커다란 충격에 빠졌지만, 즉각적으로 착한 사람으로 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죄를 지었고, 이 죄가 자베르에게 쫓기는 분명한 이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내일 또 다시 이어 드릴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1월 7일 방송>
2. 삶이 어려운 것은 땅을 일궈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 고통이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오히려 행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삶을 더욱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럴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헤롯당 그리고 사두개인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올무를 놓아 다른 누군가를 넘어져 다치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의를 실행에 옮기곤 합니다. 두 가지 일화는 내용은 다르지만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위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에 관한 질문이나, 부활 불가론을 입증해 줄 <수혼법/Levite Law>을 내 세우는 질문이, 확연히 다른 내용이지만 이런 질문을 하는 목적은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해서 정치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심판을 받게 할 수 있겠다는 의도 말입니다. 가이사는 당시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고 있는 로마의 황제의 이름입니다. 상당수의 민족주의자들은 반 가이사 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세금 거부 운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뜨거운 감자처럼 취급되었습니다. 자칫 진퇴양란에 빠질 함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금을 바치라 대답하면 비 애국자가 되게 마련이고, 바치지 말라하면 현행법에 저촉되어 고소감이 될 테니 말입니다. 다음 질문은 부활이 있다고 대답하면 형제들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될 것이 분명하고, 부활이 없다고 하면 지금까지 하늘나라 설교들이 다 거짓부리가 될 테고 말입니다. 사실 성경을 가르친다고 나서다보면, 대답하기 힘든 문제들 앞에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문제 자체보다는 그 질문을 하는 참된 의도에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서 대답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를 통해서 위대한 진리를 풀어놓고 계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통쾌 명쾌, 유쾌한 답입니까? 부활 후의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나라라고 말입니다. 아직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으셨다면, 너무 깊이 새길 필요는 없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