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물을 드리는 마음. / 막 12:45-44.
묵상자료 4300호 (2013. 2. 23. 토요일).
시편 시 73:20-25.
찬송 7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장발장은 19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린 적이 없었습니다. 증오에 사로잡혀서 영혼이 메말라 버렸기 때문이었지요. 그런 그가 밀리에르 주교로부터 은촛대까지 받은 후에, 어떤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썼습니다. “자기가 감동한 것인지, 또는 모욕을 당한 것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이따금 이상스레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으나, 그는 과거의 심리상태와 싸우며 대항하기 위해 최근 20년 동안에 얻은 냉혹한 마음으로 맞섰다. 이러한 상태는 그를 지치게 했다.” 그 때 한 소년이 노래를 부르면서 공중으로 동전을 던져 올렸다가 한 쪽 손등으로 받아내는 놀이를 하면서 다가왔고, 소년이 던져 올린 동전이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장발장 앞으로 굴러갔지요. 장발장은 동전 위에 발을 얹었습니다. 그 돈은 가난하고 귀여운 소년이 일해서 번 돈이었습니다. 소년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돈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장발장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소년이 마침내 울면서 돈을 달라고 애원했지만, 장발장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그냥 꺼져버리라고 하지요. 놀란 소년은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다가, 흐느껴 울면서 도망갑니다. 밀리에르 주교가 장발장의 영혼을 하나님께 봉헌한지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장발장은 미친 듯이 소년의 뒤를 쫓아가지만, 이미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장발장은 부르짖습니다. “아, 나는 불쌍한 인간이다.” 그리고 지난 19년간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던 그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고, 오열이 터져 나옵니다. 아직도 증오심에 사로잡혀서 또 다른 죄를 저지르고 말았기 때문이지요. 장발장은 깨닫습니다. “앞으로 훌륭한 인간이 되지 않는다면, 가장 악한 인간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이제 그는 주교보다 더 높이 오르거나, 죄수보다 더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선량한 인간이 되려면 천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나쁜 인간으로 머물러 있으려면, 악마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장발장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하지만 소년의 은화를 절도한 죄는 피할 수가 없었지요. 나중에 가짜 장발장이 체포돼서 재판정에 섰을 때, 기소 내용은 이와 같았습니다. “피고는 당국에서 오래전부터 수배 중이던 장발장이라 불리는 악인으로, 8년 전 똘롱 형무소에서 나오자 쁘띠 제르베라는 소년의 금품을 대로상에서 강도질했다. 피고는 이번에 또 새로이 절도죄를 범했으니, 이는 재범에 해당된다.” 자베르 경감이 끈질기게 장발장을 추적한 이유는 전과자가 또 절도죄를 저질러서 수배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법대로 집행한 원칙주의자 자베르에게는 잘못이 없었을까요? 20세기 초 미국의 대법관을 지낸 올리버 홈스가 했던 말이 있습니다. “법의 생명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다. 보통 사람들의 경험을 모르고 법의 논리로만 적용하면, 사람들이 법이 내린 결론에 승복치 않아서 결과적으로 그 법은 실패한다.” 는 뜻이에요. 빅토르 위고도 “지옥의 포석은 선의로 만들어져 있다.” 라는 말을 했는데요. 의도가 아무리 좋고 옳을 지라도, 과정 절차 방법이 잘못됐을 경우, 더 큰 불행을 몰고 올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장발장 뿐 아니라, 원칙주의자인 자베르 역시 법의 피해자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1월 9일 방송>
2. 요즘은 교회가 발행하는 기부금 증명서 때문에 부득이 세대별 헌금 내용을 정리 비치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교인들의 헌금 생활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누구보다 헌금을 많이 할 것 같은 위치에 있는 분들보다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 항상 앞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정이 있어서 세계 최대의 교회라는 곳의 헌금 내용을 전해 듣게 되었는데, 그 교회 역시 영세민에 가까운 분들이 헌금의 큰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개미군단의 위력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가난한 과부의 경우와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고단하고 힘든 삶일수록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도 늘 수 있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고 있다는 고백을 많이 하는 것을 듣습니다. 이에 비해서 소위 잘 나가는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보다는, 자기 자신의 능력에 더 많은 무게를 두지 않나 싶습니다. 헌금에 대해서 바르게 가르칠 책임이 목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대로 헌금하기를 바라는 타입인데, 그게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교회는 주님 앞에 모일 때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예물을 바쳐왔습니다. 그것이 예배자들이 예배에 참여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인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축복이 아닙니다. 심방에서 느끼는 일입니다만, 너무 감사해서 몸 둘 바를 모르는 교우가 있는가하면, 반면에 당연한 듯 생각하는 교우들도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일까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감격과 기쁨으로 드리는 찬송과 기도, 그건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가장 적합한 자세일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