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란. / 롬 1:16-25.
묵상자료 4303호 (2013. 2. 26. 화요일).
시편 시 74:4-7.
찬송 21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작이라는 말은 우리의 가슴을 부풀게 합니다. 왜냐하면 시작에는 이런 뜻이 포함돼 있으니까요. “나빴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새로운 가능성이 주어졌다. 다시 시작이다.” 흔히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데요. 만약에 그렇다면, 인생의 1년은 마라톤을 100m 단위로 나누는 단거리 경주와 비슷하지는 않을까요? 그러니 우리는 지금 새로운 100m 경기의 출발 선상에 서 있습니다. 스타트 총성이 울리면 땅을 힘껏 박차고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할 겁니다. 하지만 그 총성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울리지요. 명확한 목표와 꿈이 없다면, 총성은 울리지 않을 것이고, 총성이 울리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시작에만 머무르게 되겠지요. 사람은 목표와 꿈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내달리게 돼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누구나 다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 처럼요, 그리고 목표와 꿈을 이룬다면 마치 천국에 도달한 것처럼 행복해 지겠지요. 그렇다면 천국까지 다리는 속도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요?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구절이 있어요. “천국은 장소가 아니야. 그건 시간도 아니란다. 천국은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말하지. 너는 완전한 속도를 달성하는 순간 천국에 닿기 시작할거야. 그리고 완전한 속도란 시속 천 마일이나 시속 백만 마일로 나는 것도 아니고, 빛의 속도로 나는 것도 아니야. 왜냐하면 완전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지. 완전한 속도란, 얘야, 거기 그냥 존재하는 것이란다. 생각처럼 빨리 날기 위해서는 그곳이 어디든 그대는 자신이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음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단다.” 매우 철학적인 이 구절은 한편으로 이 말을 연상시켜요. 꿈을 이루고 싶다면 꿈을 이미 이룬 사람처럼 행동하라. 실제가 아니지만 명확하고 선명하고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각인시킬 때 우리의 뇌는 실제 상황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신비로운 일이 벌어지지요. 목표와 꿈을 향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마치 사랑해야 하는 사람을 보고 저절로 반응하는 몸과 마음처럼 성실을 향해서 몸과 정신 그리고 감정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잠재의식이지요. 훌륭한 사람들이 수없이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꿈을 가져라.” 그런데 여기에서 꿈이라는 건 막연하게 욕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확하고 선명하고 구체적이어야 하며, 매일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바라보며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더 높이 더 멀리 날수 있는 완전한 속도이며, 천국에 도달하는 방법이거든요. 자,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1월 2일 방송>
2.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을 때, 그걸 잘 참아내기란 어렵습니다. 제 경우를 보면 예의가 없는 사람이나, 혹은 무시하는 듯 한 언행을 하는 사람에게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게 거슬리는 것 역시 아직 덜 익은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에서 턱 말문이 막히는 기분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분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제법 많은 기독자라는 이들이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음을 눈치 채게 해 줍니다. 도대체 복음이 뭐 길래,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였기에 부끄러워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복음은 이 세상에 우리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들어낸 것들입니다. 말씀이고 약속이고 그리고 변함없는 행동들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런 복음을 부끄러워한단 말일까요? 그리고 무엇이 복음을 부끄럽게 만드는 행위일까요? 최근에 한 교회 지도자의 글을 읽었습니다. 여러분도 읽으신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읽으면서 그 분의 마음을 괴롭혔던 그 대상이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신 분도 계셨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후임자를 질책하는 글이었는데, 땅을 치고 후회에는 대목들이 곳곳에 담겨 있었습니다.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아하, 복음을 부끄럽게 만든 때문이로구나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을 자기 업적과 야망으로 도배한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제 제게 찾아온 한 노신사도 그랬습니다. 40년 전에 교회 다니길 시작했는데, 20년 전에 교회 다니길 그만 둔 분이라고 했습니다. 어쭙잖은비판정신이 그리되었노라고 회개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현실 교회를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성공주의 출세주의의 출발과 끝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고, 그리고 끝내 하나님을 팽하는 일이 아닐까요? 제발 그 흉한 얼굴을 가득 채우는 스크린을 떼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 자리에 십자가를 세워야 합니다. 복음을 더 이상 부끄럽게 만들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3. 20주년 재상봉 후 24년만의 모교방문이었습니다. 노천강당 돌 방석에 새겨진 <70 신학 박성완>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오랜 추억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