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기. / 골 3:12-17.
묵상자료 6575호(2019. 5. 18. 토요일).
시편 10:1-3.
찬송 35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이는 부모를 기쁘게 해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모색한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 아이가 선생님이 원하는 모습을 연기하는 건 굉장히 쉬운 일이다. 영리한 아이일수록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는 역할을 쉽게 잘 연기할 수 있고, 부모는 아이의 이런 역할에 쉽게 속는다. 아이는 부모가 바라는 대답, 부모가 바라는 모습을 하고 있기에 의심받지 않는다. 부모가 아이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답만 보고 듣는다면, 아이는 부모가 바라는 대로 가면을 쓰게 된다. 소통을 공부해온 김 무곤 교수의 말입니다. 아이에게 가면을 씌우지 않으려면, 다소 불편하더라도 아이의 진심을 들어주는 것과 아이가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정 분위기를 만드는 것, 이 두 가지를 잘 하면 된다고 하는데요. 오늘은 거꾸로 다소 불편하더라도 부모님의 진심을 들어드리는 날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19년 5월 8일 방송>
“아이들은 말을 떼기도 전부터, 심지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낙서하듯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특히 괴물 그리기를 좋아하는데 아이들은 왜 괴상하고 우스꽝스럽고 무시무시한 괴물을 그리는 걸까 아이들이 언제 왜 그림을 그리는지를 연구해온 아동 심리학자들은 이야기한다. 아이들은 괴물을 그림으로써 무서운 감정을 견뎌내고 긴장을 늦출 수 있다고.” 미술교육 전문가 메를린 굿맨의 이야기입니다. 굿맨의 말로는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원하는가? 이 또한 그림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고 때문에 마음껏 그림을 그리게 놔두는 것이 건강하고 행복한 성장을 돕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낙서하듯이 그려대다가 흥미를 잃는 시점이 오는데, 자기가 그린 그림을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할 때라고 합니다. 그러니 춤추던 고래도 멈추게 하는 것, 지적과 비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19년 5월 9일 방송>
2.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칙(5-11절)”을 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세상에서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비록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고는 있지만, 그래도 세상과는 다르게 구별된 몸짓을 하며 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다는 데서 오는 서글픔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한 모습이고 싶은데, 실제는 여전히 미움이 가득하다거나, 참되게 살고 싶은데 여전히 거짓된 삶을 다 해결하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권고를 듣게 될 때는 부끄러움을 넘어 화가 난다고 합니다. 더 이상 세속적인 욕망을 버려야 하고, 음행과 더러운 행위와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거짓말이나 속임수 그리고 옛 생활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힘써 노력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감추어져 있던 추한 욕망이 어느 틈새로 올라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일한 가능성은 예수 그 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는 말씀에서 위안과 희망을 얻습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그리스도인의 존재양식(存在樣式)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내던지는 일인데, 이것은 이론도 아니고, 수행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앞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한 대권주자가 지난 사월 초파일에 절간을 찾았다가 어정쩡한 자세를 취한 것이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기왕 절간에 가서 축하하고 정치적 행보를 하겠다 마음 먹었다면, 그곳의 예를 따라서 합장을 하는 것이나 이런저런 의식에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데, 뻣뻣하게 서 있기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한다면, 문제가 있는 생각이다 싶습니다. 예의를 차리는 것과 신앙을 지키는 것은 확실하게 구별되는 일인 때문입니다. 동창회가 모이면 술판이 벌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 모처럼의 즐거운 자리에서 흥을 깰 수는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앙 정체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저에겐 불교계에선 나름 유명한 고향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고향교회에 와서 옛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곤 했는데, 하나도 어색한 행동을 하지 않고 잘 따라 하였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인 말과 행동으로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이런 까닭은 평소에 세상에 대해서 소금과 빛이 되는 몸짓이나 지혜에 매우 소극적인 때문일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