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율법의 한계. / 롬 7:1-12.

박성완 2019. 5. 18. 00:15

묵상자료 4316(2013. 3. 11. 월요일).

시편 시 77:10-15.

찬송 20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프리카 발톱 개구리는 세상이 물과 진흙이라고 생각합니다. 팔마토개코 도마뱀은 세상이 모래와 이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북극 여우는 이 세상이 눈과 얼음 그리고 동굴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에 아프리카 발톱 개구리와 팔마토개코 도마뱀과 북극 여우가 만나서 이 세상이 무엇이냐?” 이것을 주제로 놓고 공방을 펼친다면, 과연 어떤 결론이 나올까요? 아마도 결론이라는 것이 나올 수 없겠지요. 팔마토개코 도마뱀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살아온 세상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해도, 또 북극 여우가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해도,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세상 밖의 세상을 이해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으니까요. 누구나 자기가 살아본 세상 밖에는 알지 못하니까요. 그것을 기준으로 설명하고 듣고 상상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어쩌면 갈등이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속임수를 쓰거나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요. 그저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진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갈등은 시작되고 싸움은 벌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서만 압니다. 그러니까 내가 안다 라고 믿고 있는 건, 그냥 내가 아는 것만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내가 아는 것만 아는 그것이 잘못하면, 우리들의 관계를 흔드는 갈등이 되고, 금이 가게 만드는 불화의 시작이 될 수 있지요. 내가 아는 것만 아는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김영현 작가는 [나쓰매 소세키를 읽는 밤]이라는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무감각과 함께 나를 무장한 단단한 갑옷 중의 하나가 바로 편견이다. 편견, 이 얼마나 편리한 것인가? 나는 나의 편견으로 남을 판단하며, 나의 편견을 통해 소리를 듣고, 나의 편견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비로소 안심하고 이해를 하는 것이다. 편견은 나의 지식이며 힘이며 폭력이며 권력이자, 동시에 나의 안락한 집이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나의 편견으로 세상과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나의 편견은 곧 숙명적으로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편견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는 그의 편견으로 나를 판단하며, 그의 편견을 통해 소리를 듣고, 그의 편견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만 비로소 안심하고 이해를 하는 것이다. 편견은 그의 지식이며 힘이며 폭력이며 권력이자 동시에 그의 안락한 보금자리이다. 이 두 편견은 서로 다투며 갈등하고 심지어는 죽음도 불사한다. 어떤 철학자의 농담에 의하면, 인류 역사상 전쟁으로 죽은 사람보다 의견차이로 죽은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218일 방송>

 

2. 사람마다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런 특징 때문에 그 사람이 제 모습을 갖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특징을 열심히 찾아볼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야 남들도 자신의 특징을 알아봐 줄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특징이 무엇일까? 제 눈에 비친 사도의 특징은 율법과 복음을 분별하려고 힘썼다고 규정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율법보다는 복음에 기울어져 있는 사도의 특징 때문에 자칫 율법을 소홀히 여기고 복음만 강조하는 모습으로 비쳤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런 걱정을 말끔히 씻어내는 것 같아 보입니다. 사도는 율법과 계명이라는 말을 번갈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까 율법과 계명은 사촌정도의 가까운 말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조금 더 큰 의미로, 계명은 율법의 한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νομος)은 원리와 규범이라는 개념으로, 계명(εντολη)은 구체적인 명령이나 법규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그 자체가 선이나 악이 아니라, 오히려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선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사도는 율법을 따르는 삶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게 확실합니다. 그러니까 선악을 분별하는 것에 민감하다는 것은 지혜로운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율법에 따른 삶, 곧 율법적 삶이란 우리들 인간의 실존을 더욱 더 죄인임을 알게 해 주는 것으로 끝날 뿐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 말입니다. 저의 교회에 성균관으로부터 효자 효부 상을 받은 분이 계시는데, 정말 자신을 효자라고 생각하느냐는 쌩뚱맞는 질문에, 불효자임을 더욱 더 깨우쳐주는 상이라고 대답한 것처럼, 율법이 효자를 만들어 주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 같습니다그래서 사도는 율법의 최종 역할을 복음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παιδαγωγος/3:24)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이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게 아니라, 오직 복음만으로(그리스도의 공로 혹은 은총만으로) 의롭게 된다 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