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는가? / 롬 8:1-11.
묵상자료 4335호 (2013. 3. 30. 토요일).
시편 시 80:4-6.
찬송 8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 일요일은 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축일로 꼽는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날짜를 따로 정하지 않고, 325년 콘스탄틴 황제가 결정했던 대로, 춘분 후 첫 번째 보름달이 뜬 다음에 오는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고 있는데요. 엊그제 밤하늘에 정말 둥글고 환한 보름달을 볼 수 있었지요. 그 보름달이 바로 춘분 후에 뜬 첫 번째 보름달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부활절을 정하는 기준이 춘분이었을까요? 부활절에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종교적 전통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전통과 유대교, 그리고 다신교의 전통이 그것입니다. 부활절을 뜻하는 영문 표기 이스터(Easter)는 튜턴족의 여신 에우스트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요. 봄과 다산의 여신이었지요. 4월은 이 여신에게 바치는 달이었고, 춘분 날 축제를 치렀습니다. 춘분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이자, 이제부터 낮이 밤보다 길어지는 태양이 부활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고대의 동양과 서양에서 모두 이 춘분을 본격적인 1년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이 날 고대 조로아스터 교도들은 겨울에 죽었던 태양이 부활해서 돌아온 것을 축하하면서 달걀을 주고받았고요. 유대교에서도 비슷한 전통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달걀이 생명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 역시 고대인의 보편적 믿음이었습니다. 달걀이 병아리가 되고 병아리가 성장해서 닭이 되고, 다시 달걀을 낳고. 이 달걀의 단단한 껍질을 깨고 병아리가 나오는 과정을 짚어보면, 마치 봄이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서 다시 봄이 되는 과정. 그리고 죽었던 생명이 다시 부활하는 과정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서 달걀을 투척하는 행위도 부활절과 연관이 있을까요? 달걀 세례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기독교와 연관이 있고, 부활절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습니다. 다른 물건도 아닌 하필 달걀을 던지는 이유는요, 그것보다 더 딱딱한 물건을 던지면 다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겠지만요, 던진 달걀을 맞고 회개하고 새로 태어나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나 차량에 달걀을 던지는 것은 범죄행위입니다. 눈에 맞아서 잘못되면 실명 위험도 있고요. 미국에서는 할로윈 데이에 아이들이 장난삼아서 지나가는 차량에 날달걀을 던지곤 하는데, 사고가 빈번해지면서 엄벌에 처하고 있다고 하지요. 긴 겨우내 죽은 듯이 보였던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부활과 달걀. 우리도 딱딱한 껍질을 깨고, 기지개 한번 켜봐야겠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3월 29일 방송>
2. 오늘 본문에는 육신과 영을 잘 대조하고 있습니다. 육신이란 단순히 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물들어 있는 육신적 삶 전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고백하듯 말합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절) 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르게 사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죄된 생각과 욕망에서 출발하고 있는 셈이니, 그 또한 잘못된 삶이라고 말입니다. 누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산다 함은 무슨 말입니까? 어떤 누구처럼 자기 마음대로 그리스도의 영을 가질 수도 줄 수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영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그리스도께 맡기는 마음과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를 따라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주관하도록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1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기독자의 존재양식(樣式),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깨달았습니다. 마치 안디옥 교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배경에는,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할 때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주저 없이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 그리했을 뿐이라고 하며, 항상 그리스도를 앞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 밖의 사람들은 그들을 부르기를 “그리스도를 앞세우는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곧 <작은 그리스도>라는 의미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가 얼마나 찐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우리의 모습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습니까?
3. 주님께서 무덤에 계십니다. 초대 교회지도자들은 무덤에 계신 주님을 지옥을 방문 중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벧전 3:19). 사도 신조의 고백이 된 배경이지요. 오늘은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