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세례 요한의 고민과 분노. / 눅 3:1-14.

박성완 2019. 5. 19. 01:07

묵상자료 4347(2013. 4. 11. 목요일).

시편 시 83:13-15.

찬송 52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의 무대인 독일의 하멜론은, 다른 유럽 도시들과 달리 거리의 악사를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도시 한복판에서는 아예 음악연주가 금지돼 있다고 하지요. 워낙 유명한 동화의 무대라는 이유로 관광지가 된 곳이라서,

그 이미지를 지켜나가려는 뜻일 수 있겠다 짐작해 볼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이 동화는 실제로 벌어졌던 일을 바탕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런 금지가 더 쉽게 이해되지요. 중세의 하멜론에는 주변 농가에서 싣고 온 밀을 빻아주는 제분소들이 모여 있었고요. 그러다보니 몰려드는 쥐 떼들이 들끓고 있어서 온 도시 사람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피리를 부는 사냥꾼이 나타나서 금화 천개를 주면 쥐 떼들을 없애주겠다 약속을 하지요. 그런데 막상 쥐들을 다 없애주자, 제분소 주인들은 다 금화 천개라는 보수가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자 쥐 사냥꾼은 어른들이 교회에 간 틈에 요란한 의상을 하고 신나게 피리를 불어서 아이들을 불러 모은 뒤에, 하멜론을 빠져나가버립니다. 1284616일 그렇게 하멜론에서는 사라진 130여명의 어린이가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지요. 하멜론이라는 도시에서는 가장 크고 비극적인 사건 중의 하나였습니다. 동화의 무대이기 이전에 비극의 무대였던 도시답게, 그들이 겪은 가장 큰 비극을 길고 조용하게 애도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대체로 비극을 조명하는 일에는 별로 관대하지 않지요. 비극을 겪은 사람들이 상처를 얘기할 때면, 이제는 잊을 때가 됐다고,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됐다고, 입을 막는 분위기가 되기 쉽습니다. 방관자들의 그런 조바심이 오히려 상처를 덧내기도 하고요. 그래서 하멜론의 이야기는 더욱 돋보입니다. 그들의 길고도 지혜로운 감동마저 이끌어내는 애도의 자세가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0823일 방송>

 

2.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과 회개라는 말을 동일한 사람에게 적용하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에 대해, 낯설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 당시의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던 것 같습니다만. 우리 시대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저와 생각의 코드가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세례자 요한은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보았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율법적 의를 이루려 한다거나, 율법에 만족을 주려는 회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요구하고 있다는 데 멈춰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 우리들의 시대에도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소위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역설적 요청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복음에 대해서 큰 혼돈을 겪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 입으로는 예수의 사람이라고 외쳐대고 있는데, 실제는 예수의 사람과는 너무 멀리 떨어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교회 안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온갖 부정과 불의를 저질러서 고소 고발을 당하고 있는 이들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여전히 TV에 등장해서 진리의 사도인양 외쳐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세상 지도자가 그랬다고 한다면 더 이상 고개를 숙여버렸을 것 같은데, 유독 교회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데에, 우리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받는 현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서 회개가 필요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율법적 의를 위한 회개가 아니라, 거짓 복음에서 참 복음으로의 방향 전환인 회개가 필요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회개라는 말은 헬라어로 메타노이아(μετανοια)로 방향을 바꾸는 행동을 말합니다. 입에 발린 복음이 아니라, 복음에 붙들린 삶을 향해서 방향을 바꾸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